충북본사 편집국장
[나인문의 窓]

충청투데이가 11일로 창간 26주년을 맞는다.

대전·세종·충북·충남 등 충청권 4개 광역 시·도를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충청권 최고의 정론지를 표방하며 창간 14년 만에 대전본사와 별도로 충북본사를 창사한지도 어언 12년을 맞이했다. ‘늘 깨어있는 신문, 열려있는 신문’으로 충청인과 함께 해 온 세월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충북 신문 따로, 대전·충남 신문 따로, 양분된 충청권을 하나로 묶기 위해 2005년 1월 2일 대전매일신문에서 충청투데이로 제호를 바꾸고 ‘충청인의 뜻을 대변하는 신문’을 만들기 위해 일신(一身)의 안위를 던져 넣고 일한지도 열두 해를 맞이했다.

하지만 아직도 내 밥그릇을 뺏기는 게 아닌가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제 눈의 들보는 못보고 남의 눈에 티끌이 있는지만 탓하는 이들이 있으니 웃프다. 입으로는 상생을 외치면서 아직도 대전 신문이니, 충북 신문이니 졸렬한 편 가르기에만 매달리는 이들이 있으니 하는 말이다.

요즘 들어 ‘신문의 위기’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 종이신문의 설 자리가 그만큼 위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엄중한 질책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일성(一聲)을 고한다. 아무리 매체가 범람해도 신문의 존재감은 분명하다고 말이다.

신문은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망국의 국호아래서도 엄연히 살아 있었다. 엄혹한 무단통치의 손아귀에서도 바른 말을 했고, 힘을 가진 자가 재갈(馬銜·마함)을 물리려 해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정책을 비판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것도 신문의 소임이었고, 민주주의의 퇴보를 막기 위한 것도 신문의 사명이었다.

물론, 민초들의 피와 땀이 엉긴 귀중한 세금이 축 나고 백성들의 허리가 휘든 말든 자신들의 양명을 위해 도적질에만 매달리는 위정자들의 험상궂은 몰골을 파헤치는 것도 신문의 역할이었다. 부정과 비리를 감시하는 파수꾼의 역할 대신, 불의에 눈감고 부조리에 귀먹은 파수견이 됐다면, 신문은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던 토머스 제퍼슨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리 민족은 그동안 좌우 이념대립, 6·25동란, 그리고 보릿고개를 넘어야 살아남을 수 있던 가난의 질곡과 독재의 신산(辛酸)을 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게 험난한 세파를 뚫고 오늘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은 흉포한 권력에 굽실거리는 문약(文弱)이 되지 않도록 이끈 민중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난마처럼 얽혀 있는 모리배들의 부정과 부패를 만천하에 알릴 수 있었던 것도 펜의 힘을 믿는 민심이 있었기에 ‘그 어려운 걸 또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언론은 ‘언치논도(言治論道)’의 줄임말이다. 바람직한 치도(治道)로, 무너진 길을 고쳐 닦는 ‘길닦이’를 의미한다. 따라서 민심의 총기(聰氣)를 흐려서도 안 되고, 오만을 부려서도 안 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터럭 같이 가벼운 신문 몇 쪽 만들면서 텃세를 부리는 이들이 있으니 기가 찰뿐이다. ‘칼’을 만지니 ‘칼’인 줄 안다. 그 세(勢)가 거칠고 살차다.

대곡(大哭)한다. 유가 부수 1만부도 발행하지 못하는 신문은 여론을 제대로 대변할 수 없다. 그런데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제 밥만 차지하려고 목소리만 높이는 것은 스스로 앉은뱅이를 자임하는 꼴이다. 아무도 밟지 않는 흰 눈밭에 자국을 남기는 건 ‘개’가 아니라 ‘사람’이어야 한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강한 법이다. 그렇다고 그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빛만 따라 갈 수도 없다. 가장 두려운 건 문장과 시각이 늙바탕에 접어든 이들이 아니라 진실을 믿는 독자다. 다시 ‘칼’을 간다. 늘 독자와 호흡하며 지역발전을 선도하는 지방지의 본령을 다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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