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부기 http://blog.daum.net/crazyturtle

국민학교(나이 나온다) 시절의 운동회를 추억하면, 먼지 자욱한 운동장과 함께 주전부리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운동장 구석에 자리 잡은 잡상인들이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노렸다. 잡상인들은 말도 안 되는 주전부리를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팔았는데, 나는 운동회날이면 그런 주전부리에 혹해서 기껏 모은 용돈을 한큐에 날려버리곤 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혹했던 주전부리는 번데기였다.

고소하면서도 짭조름한 감칠맛. 그 맛이 '미식가(MSG)' 혹은 'DSD(다시다)'에 막대한 부분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 더 나이 들어 알게 된 진실이지만. 그런데 잡상인들이 파는 번데기의 '가성비'는 최악이었다.

포장지는 대개 깔때기 모양으로 말은 종이였는데, 번데기를 한 국자 담기에도 모자란 용적이었다. 얼마 먹지 않았는데도 금세 바닥이 났기 때문에 아쉬워서 그 맛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불온한 식품에 환장하며 용돈을 낭비하는 아들의 모습을 본 어머니는 용단을 내리셨다. 바로 집에서 번데기를 대량으로 만드는 것이다. 국민학생 시절 나는 대전 오정동 농수산물도매시장 근처에 살았는데, 시장 정문 앞에 건어물시장이 있었다. 어머니는 종종 농수산물도매시장에 다녀오는 김에 건어물시장에도 들러 번데기를 한 되씩 사오셨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번데기 한 되의 가격은 약 2000~2500원이었다. 번데기 한 되는 작은 검은 비닐봉지를 꽉 채울 정도로 양이 많았다. 어머니가 번데기를 사 오신 날이면 주방에는 구수한 냄새가 넘쳤고, 그런 날이면 나는 번데기를 숟가락으로 퍼먹는 호사를 누렸다. 조리법은 간단했다. 깨끗하게 번데기를 씻은 뒤 'DSD'를 듬뿍 물에 풀고 끓이면 끝이였다. 그리고 번데기는 오래 끓일수록 더 깊은 맛이 우러났다.

내가 술을 마셔도 되는 나이를 먹은 후 놀란 사실은 번데기를 숟가락으로 퍼먹는 호사를 누려본 이들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술집에서 기본안주로 나오는 번데기는 내 입장에선 간에 기별도 안 되는 양이었다. 나는 번데기를 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먹는 이들에게 숟가락으로 번데기를 퍼먹던 내 과거를 들려주며 종종 허세를 부렸다. 그런데 이 허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가 있었다. 내가 공익근무시절에 후임으로 만난 나보다 나이가 5살 많은 형님이었다.

내 후임으로 온 이 형님은 사회에서 작곡 등 음악 활동을 하다가(YG에서 활동했었다고 들었다) 뒤늦게 공익근무를 하게 된 케이스였다. 이 형님과 음악적으로 통하는 면이 많았던 나는 형님으로부터 미디를 다루는 많은 요령을 배웠다. 이 형님 덕분에 나는 공익근무 시절에 정말 많은 곡을 미디로 만들었다. 내가 2014년에 발표한 앨범 '오래된 소품'에 수록된 5곡 중 3곡을 이 시절에 만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나와 음악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던 이 형님은 내 허세 섞인 이야기를 듣더니 "나는 어렸을 때 번데기를 숟가락으로 퍼먹는 게 꿈이었다"고 고백했다. 오호라! 고마운 형님께 그런 소원 하나쯤을 실현해드리는 게 무슨 어려운 일인가? 공익근무지에 출근하기 전 시장에 들러 번데기 한 되를 구입한 나는 근무 시간이 끝난 뒤 이 형님을 붙잡았다.

나는 사무실에 비치된 버너 위에 큰 냄비를 올린 뒤 번데기 한 되를 모두 쏟아붓고 끓였다. 고향의 맛 'DSD'도 만만치 않게 집어넣어 간을 맞췄다. 빈 사무실에는 구수한 번데기 냄새가 가득 찼다.

번데기가 모두 끓은 후, 나는 4홉짜리 페트병 소주 한 병을 까서 글라스에 나눠 따랐다. 이 형님은 소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내가 끓인 번데기를 한 숟갈 가득 퍼서 입에 집어넣었다. 곧 이어 이 형님의 얼굴에서 행복으로 가득한 표정이 피어났다. 지금까지 내가 만든 음식을 이렇게 맛있게 먹어준 이는 없었다. 정말 뿌듯했다. 어머니의 심정도 나와 같았을까?

요즘에는 시장에서 됫박으로 파는 번데기를 보기 어려운 세상이다. 마트에 가면 저렴한 가격으로 잘 조리된 번데기 통조림을 구입할 수 있으니, 굳이 시장에서 됫박으로 번데기를 구입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번데기 통조림이 간편하고 맛있어도, 직접 끓여서 먹던 맛보다는 못한 것 같다. 요즘에는 아쉬운 대로 번데기 통조림을 살짝 튜닝해 먹곤 한다.

통조림 2~3개를 까서 냄비에 옮겨 담은 뒤 청양고추 한두 개를 쫑쫑 썰어서 다시 끓여내는 것이다. 고추가루와 양파가 추가돼도 좋다. 1인용 뚝배기가 있다면 더욱 좋다. 버너에서 내려온 뒤에도 보글보글 끓는 번데기의 비주얼은 그 자체로도 위를 꼴리게 하니 말이다.

야심한 밤에 이보다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맛있는 소주 안주도 드물 것이다. 썰을 풀다보니 번데기가 먹고 싶어졌다. 동네 슈퍼에 다녀와야겠다.

(이 글은 5월 29일 작성됐습니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