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재발견(24) 문창동 오토바이골목
80년대 전국 3대 오토바이 메카 부상
배달용으로 인기… 가게 40여곳 몰려
생계형 손님늘자 생물로 거래하기도
“최근 불황에 소비자들 다시 늘었죠”

부릉, 부릉, 오토바이 엔진이 말발굽 소리를 닮은 배기음을 뿜어내자 가슴이 설렌다.

학창시절 산울림의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를 들으며 빗자루로 오토바이 타는 시늉을 하며 자라던 사람들에게 오토바이란 신성한 그 무엇과도 같은 존재다.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질 것 같은 광택 나는 바이크 한 대로 가로수가 끝없이 펼쳐진 국도를 누비는 상상을 하면 코끝에 바람이 휙휙 불기 시작한다.

대전 중구 문창동 오토바이거리는 빗자루를 타며 놀던 꼬마들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곳이다. 기자가 찾아간 날에도 오토바이거리 골목골목을 두건을 쓴 사내들이 육중한 배기음을 뿜어내며 오토바이를 모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조성된 대전 오토바이거리는 서울 중구 퇴계로, 대구 중구 인교동과 더불어 전국 3대 오토바이 메카로 불리고 있다. 당시 오토바이 산업은 국내에 기아오토바이만 존재하다 대림그룹이 혼다와 손을 잡고 효성그룹이 스즈끼와 기술제휴를 맺으며 대림혼다(現 대림자동차), 효성스즈끼(現 KR모터스)가 태동해 절정기를 맞았다.

특히 요식과 가스업계에서 오토바이를 배달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며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대리점과 도색, 쇼바(쇼크업소버·shock absorber), 시트, 보링, 재생 등 관련 업체가 지역 곳곳에 생겨났고, 이들 상가가 한곳에 모여 자연스레 오토바이거리가 만들어졌다.

시대가 변하며 오토바이가 일탈의 상징이라는 오명을 쓰고, 불량배나 타는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사회에 퍼지자 산업도 덩달아 주춤하기 시작했다. 또 완성차산업의 발달과 맞물려 사람들이 바이크를 내려놓고 자동차를 타기 시작하자 오토바이거리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옛날만 하더라도 오토바이 인기가 상당했지. 3~4개 가게가 모여서 장사를 시작해 절정기에는 40여개 넘었어.”

오토바이 사업만 40년, 문창동 오토바이거리의 산 증인인 지정석 합동부속상사 대표(중구발전협의회 회장)가 당시를 회상하며 운을 뗐다.

40여개 업체가 붐볐던 과거와 달리 문창동 오토바이거리에 남아있는 가게는 20여개로 전성기의 절반가량 남아있다.

지 대표는 “원도심으로 불리기 전에는 시청, 도청, 경찰청 대전의 중심 바로 옆이 문창동이니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며 “과거에는 충청도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전라도, 경상도에서도 손님이 왔었다”고 말했다.

1997년 오토바이거리에 터를 잡은 전재근 대진오토바이 대표는 불경기가 오래 이어지자 최근 자동차에서 다시 오토바이를 찾는 손님이 다시 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27살부터 오토바이 업계에 뛰어들어 기름밥만 23년을 먹었다는 전 대표는 “오토바이 인기가 한동안 시들었다가 최근부터는 50대 이상 손님들이 값비싼 차 대신 많이들 사가고 있다”며 “다들 호주머니 사정이 녹록지 않으니 저렴한 오토바이가 잘 나간다”고 말했다.

생계형으로 몰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보니 돈 대신 생물로 오토바이를 구매하는 사람도 왕왕 존재했다.

전 대표는 3년전 즈음에는 산에서 약초를 캐던 약초꾼이 돈이 없어 산삼을 건네주고 오토바이를 사 갔다는 웃지 못 할 일을 설명하곤 너털웃음을 지었다. 업계가 예전만 못해졌다지만 문창동 오토바이거리는 꿈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그리고 생업을 위해 오토바이를 찾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오늘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재훈 기자 jjh119@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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