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 글, 임용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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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
甲子士禍(35)


임사홍은 인수대비의 언문서 한역문(漢譯文)을 다시 언문으로 풀어서 왕에게 읽어 바쳤다.

왕은 폭발하려는 흥분을 눌러 참으며 끝까지 듣고 나서 울분을 토로하였다.

"대왕대비의 언문서라는 것이 구구하게 폐비의 죄를 얽어서 열거하고 있지만 폐비가 어선에 독약을 탈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야말로 근거도 없이 악의(惡意)에 찬 추측으로 성종대왕을 시해하고 원자인 나를 왕으로 세운 후 섭정하려는 흉악한 마음을 품었다고 단죄하고 있으니 대왕대비가 어떻게 왕비를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오? 조정의 신하들은 억울하게 쫓겨나 죽은 폐비를 왜 구하지 않은 것이오?"

"전하, 조신들이 폐비를 구하려고 간하다가 투옥되기까지 한 사실은 이미 신이 아뢰고 전하께서 시정기를 보신 바와 같사옵니다. 폐비 후에 나라에서 쌀 한 말, 무명 한 필도 내려준 것이 없었으니 폐비의 곤궁한 형편이 세간에 소문이 나고 고부(姑婦)간의 갈등과 후궁들의 참소 때문에 억울하게 폐출당하신 사정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고, 원자이신 전하께서 차차 장성해 가시매, 인수대비와 정씨, 엄씨들은 불안하였을 것이옵니다. 교리(校理) 권경우와 대사헌 채수가 경연이 파한 후에 폐비에 대한 동정론을 편 것이 성종대왕과 인수대비의 노여움을 사서 폐비에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한 일이 있사옵니다. 폐비에게 사약을 내리던 임인년 8월로 기억되옵니다만 시정기에 기록이 있을 것이옵니다."

임사홍은 다시 시정기를 뒤적거려 그의 기억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당시의 기록을 찾아냈다.

"전하, 틀림없사옵니다. 여기 기록이 있사옵니다."

"어디 이리 주시오."

임사홍은 시정기를 편 채로 왕의 안상 위에 올려놓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로 여기서부터이옵니다."

임인년 8월 어느 날 아침 경연에 입시한 교리 권경우가 경연이 파한 후에 상주한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

"폐비 윤씨에게 대하여 상주할 말씀이 있사옵니다. 신은 이 말씀을 아뢰고 죄를 받더라도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권경우의 첫마디 말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폐비 처분을 불가하다고 반대하고 폐비를 옹호하거나 동정하여 성종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한 것으로 생각되어 당시에 폐비 처분이 불가하다든가 무리였다는 세론(世論)이 없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였다.권경우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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