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건설人]
건축학도시절 사업가 재능 발견
30대 물불 안가리고 사업 추진
지역업계 수주순위 2~3위 다퉈
노하우·신뢰·동료 ‘성공 핵심’
뻔뻔함과 무모함, 불굴의 도전정신과 의협심, 끝장을 보고야 마는 투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뚝심, 탁월한 승부사 기질이 생전 정주영 회장과 꼭 닮았다.
올해로 창립 15주년을 맞이한 건국건설 창업자인 조 대표는 이립(而立)의 어린 나이에 건설업체 CEO라는 타이틀을 당당하게 명함에 새겼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린 조 대표의 성공기는 지역 사회에서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건축학도 시절부터 안전성, 특화된 시공기술과 씨름했던 조 대표는 일찌감치 사업가 틀을 갖추고 실패를 이겨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특히 인간 ‘조항용’을 성공한 CEO로 만든 것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천부적인 재능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 대표의 건설 인생은 풍운의 꿈을 안고 대구로 떠났던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의 한 건설회사에서 3년간 근무했던 조 대표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으며 타 회사의 러브콜 대상으로 떠올랐고 그 소문이 대전까지 전해져 그리웠던 고향땅을 다시 밟게 됐다. 그러나 자리를 옮긴 회사에서는 고작 1년밖에 근무하지 못했다. 입사 1년만에 회사가 최종 부도처리됐고 덕분에 회사원으로의 인생은 마침표를 찍어야했다.
“그때가 인생에 있어 첫 위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하지만 위기 뒤에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온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두렵지는 않았어요.”
회사에서 나온 조 대표는 당시 건축기사 자격증이 있어 보다 안정된 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뜻밖의 승부수를 던졌다. 무일푼으로 무작정 골조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직원은 달랑 저 혼자였죠. 지인들은 다들 미친 놈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저 스스로는 그때가 가장 자신감이 넘쳤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막상 사업에 뛰어들고 보니 서른 살 청년에게 이 세상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공사 하나 따내는 것이 바윗돌을 깨 모래알을 만드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까지 내몰렸을 때 조 대표는 물불을 가릴 수 없는 절박한 처지였다. 낮은 단가로 남들이 꺼려하는 공사를 미친 듯이 수주했고 도저히 이윤을 낼수 없는 공사에도 뛰어들었다.
덕분에 카드빚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정말 힘든 시기였어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엔지니어의 자존심은 버릴 순 없었죠. 그래서 낮은 단가의 공사도 최선을 다했어요. 결국 그 노력은 저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병무청에서 발주한 독신자 숙소의 노출 콘크리트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실력을 인정받게 됐고 ‘건설’이라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됐습니다.”
조 대표는 2001년 200만원을 들고 건국건설을 창업했다. 사업 밑천은 오직 현장에서 터득한 건설관리 노하우, 신뢰, 그리고 믿을 수 있는 동료뿐이었다.
하지만 밑바닥부터 성실하게 쌓아온 조 대표의 저력은 대형공사를 잇따라 성공시키는 성과를 낳았고 그렇게 보낸 10년의 세월은 건국건설을 지역업계 수주 순위 2~3위를 다투는 거물로 재탄생했다. 지금은 국내 굴지의 대형건설사들과도 수주전을 벌일 만큼 브레이크 없는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조 대표는 건국건설의 성공 신화를 자신의 공이 아닌 협력업체 대표들과 건국건설 직원들의 몫으로 돌렸다.
“건국건설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세번의 큰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협력업체와 직원들간 신뢰로 버텨냈죠. 아직도 성공에 목말라있지만 앞으로 더 성공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저의 파트너들이 든든하게 지켜주기 때문일 겁니다.”
여전히 성공에 목말라 있다는 조 대표는 얼마전 캄보디아에서 직원들과 협력업체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창립 15주년 파티를 열고 향후 100년을 내다보는 청사진을 그렸다.
이승동 기자 dong79@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