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건설人]
건축학도시절 사업가 재능 발견
30대 물불 안가리고 사업 추진
지역업계 수주순위 2~3위 다퉈
노하우·신뢰·동료 ‘성공 핵심’

건설 엔지니어 출신 조항용(48) 건국건설 대표는 대한민국 기업가 정신을 대변하는 거인 ‘정주영’으로 통한다.

뻔뻔함과 무모함, 불굴의 도전정신과 의협심, 끝장을 보고야 마는 투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뚝심, 탁월한 승부사 기질이 생전 정주영 회장과 꼭 닮았다.

올해로 창립 15주년을 맞이한 건국건설 창업자인 조 대표는 이립(而立)의 어린 나이에 건설업체 CEO라는 타이틀을 당당하게 명함에 새겼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린 조 대표의 성공기는 지역 사회에서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건축학도 시절부터 안전성, 특화된 시공기술과 씨름했던 조 대표는 일찌감치 사업가 틀을 갖추고 실패를 이겨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특히 인간 ‘조항용’을 성공한 CEO로 만든 것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천부적인 재능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 대표의 건설 인생은 풍운의 꿈을 안고 대구로 떠났던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의 한 건설회사에서 3년간 근무했던 조 대표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으며 타 회사의 러브콜 대상으로 떠올랐고 그 소문이 대전까지 전해져 그리웠던 고향땅을 다시 밟게 됐다. 그러나 자리를 옮긴 회사에서는 고작 1년밖에 근무하지 못했다. 입사 1년만에 회사가 최종 부도처리됐고 덕분에 회사원으로의 인생은 마침표를 찍어야했다.

“그때가 인생에 있어 첫 위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하지만 위기 뒤에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온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두렵지는 않았어요.”

회사에서 나온 조 대표는 당시 건축기사 자격증이 있어 보다 안정된 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뜻밖의 승부수를 던졌다. 무일푼으로 무작정 골조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직원은 달랑 저 혼자였죠. 지인들은 다들 미친 놈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저 스스로는 그때가 가장 자신감이 넘쳤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막상 사업에 뛰어들고 보니 서른 살 청년에게 이 세상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공사 하나 따내는 것이 바윗돌을 깨 모래알을 만드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까지 내몰렸을 때 조 대표는 물불을 가릴 수 없는 절박한 처지였다. 낮은 단가로 남들이 꺼려하는 공사를 미친 듯이 수주했고 도저히 이윤을 낼수 없는 공사에도 뛰어들었다.

덕분에 카드빚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정말 힘든 시기였어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엔지니어의 자존심은 버릴 순 없었죠. 그래서 낮은 단가의 공사도 최선을 다했어요. 결국 그 노력은 저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병무청에서 발주한 독신자 숙소의 노출 콘크리트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실력을 인정받게 됐고 ‘건설’이라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됐습니다.”

조 대표는 2001년 200만원을 들고 건국건설을 창업했다. 사업 밑천은 오직 현장에서 터득한 건설관리 노하우, 신뢰, 그리고 믿을 수 있는 동료뿐이었다.

하지만 밑바닥부터 성실하게 쌓아온 조 대표의 저력은 대형공사를 잇따라 성공시키는 성과를 낳았고 그렇게 보낸 10년의 세월은 건국건설을 지역업계 수주 순위 2~3위를 다투는 거물로 재탄생했다. 지금은 국내 굴지의 대형건설사들과도 수주전을 벌일 만큼 브레이크 없는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조 대표는 건국건설의 성공 신화를 자신의 공이 아닌 협력업체 대표들과 건국건설 직원들의 몫으로 돌렸다.

“건국건설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세번의 큰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협력업체와 직원들간 신뢰로 버텨냈죠. 아직도 성공에 목말라있지만 앞으로 더 성공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저의 파트너들이 든든하게 지켜주기 때문일 겁니다.”

여전히 성공에 목말라 있다는 조 대표는 얼마전 캄보디아에서 직원들과 협력업체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창립 15주년 파티를 열고 향후 100년을 내다보는 청사진을 그렸다.

이승동 기자 dong79@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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