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다섯 번의 감옥살이, 두 번의 교수 해직을 당했던 '시대의 지성인' 리영희(1929~2010년) 교수를 1998년 충북 증평에서 만났다. 그는 엘란트라 승용차를 타고 있었다. 그에게 '세상을 쉽게 사는 법이 없느냐'고 선문답을 던졌다. 그는 대뜸 '세상이 쉽지 않은데 너무 쉽게 사는 게 문제이고, 빠르지 않아야 하는데 너무 빠른 게 걱정'이라고 했다. 내 기억으로는 그의 엘란트라 핸들에는 '수신(守身)○○', 아니면 '수신(修身)○○'이라는 글귀가 한지(韓紙)에 쓰여 있었던 것 같다. 본분을 지켜 불의에 빠지지 않거나,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해 심신을 닦겠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백 번 만졌을 운전대에 쓰인 글귀가 참으로 일침이었다.

▶우린 운전면허를 너무 쉽게 땄다. 직선거리로 50m 정도 운전을 하면서 방향지시등 한 번 켜고, 와이퍼 한 번 작동하고, 급브레이크 밟는 게 기능시험의 전부다. 한마디로 직진만 할 수 있으면 합격이다. 전체 교육시간도 13시간에 불과하다. 학과시험 5시간, 기능시험 2시간, 도로주행 6시간으로 하루 반이면 운전면허 취득이 가능하다. '리어카 면허'를 가지고 ‘자동차’를 운전하니 흉기면허증이라는 소리도 나온다. 운전자들의 투사(投射)는 '내 잘못'을 무의식적으로 '네 탓'으로 돌리는 심리적 현상이다. '내 탓이 아니라'는 단서가 붙은 행복은, 단서가 채워지는 순간 불행해진다.

▶8282(빨리빨리)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무조건 빠른 게 미덕이다. 밥 먹는 것도 급하고, 일하는 것도 급하다. 급출발, 급가속, 급정지가 몸에 배어있다. 본능적으로 제일 앞서는 주자를 따라잡으려고 한다. 채찍을 들고 자신의 말(馬)과 남의 말(馬)을 동시에 때리는 격이다. 도로에는 두 종류의 '종족'이 질주한다. 너무 느리게 달리는 종족과 바짝 따라붙는 종족이다. 달리지 말라면 더 달리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닌가. 하지만 5분 빨리 가려다가 50년 일찍 갈 수도 있다. 남성은 '말(言·馬)을 듣지 않고, 여성은 지도를 못 읽는다'는 얘기는 결국 지능의 차이가 아니라, 본능의 차이다.

▶맨발의 무용가로 유명한 이사도라 던컨은 1927년 9월 프랑스 니스의 해안도로에서 목에 두르고 있던 빨간 숄이 타고 있던 스포츠카의 바퀴에 말려 들어가는 바람에 숨졌다. 그건 불운이 아니라, 불행이었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버리고 걷기 시작한 순간 범죄의 소굴이었던 뉴욕은 미국의 모든 대도시 중 가장 범죄율이 낮은 도시가 됐다. 속도는 시간에 종속된 개념이지만, 사실은 시간에 속도가 종속돼있다. 거리감은 얼마나 빨리 당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안전하게 갈수 있느냐의 문제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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