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아이들이, 아이들일 때 많이 놀아주지 못했다. 내가 택한 건 송일국이나 추성훈이 해주는 ‘연예인 이벤트’가 아니라, 그냥 우유병을 삶고 설거지를 하는 정도였다. 가끔 와이프가 멋대가리 없는 아빠라고 평가하면 그때서야 섬으로 놀러갔다. 물론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도 설거지만 했다. 나의 아버지 또한 나와 놀아주지 않았다. 노동이 놀이였다. 해도 해도 표가 나지 않는 농사일에 투입됐고, 잠시 틈이 나면 미루나무 위에 올라가는 게 놀이였다. 미루나무에서 내려다보는 절망의 높이는 서글펐다. 너무 외로워 나무에서 그냥 뚝 떨어질까도 생각했다. 꿈은 없었다.

▶어릴 적 꿈은 지긋지긋한 농촌의 막일에서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은 거였다. 물론 아버지의 꿈도 몰랐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해떨어지는 순간까지 그냥 일만 했다. 그래서 그 눈물의 의미도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의 꿈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의 꿈은 거창하지 않았다. '밭농사'를 열심히 해서 '자식농사'를 잘 짓고 싶어 했다. 때문에 한겨울 꽁꽁 언 물에서도 빨래를 했고 식은 밥도 도맡아 드셨다. 그 절박한 삶의 ‘냉기’가 없었다면 가족의 온기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자기들끼리'만' 논다. 아빠와 술 한 잔 섞어도 될 나이인데 나와는 놀지 않는다. 그래, 좋다. 아빠의 꿈은 애초부터 없었다. 밤낮 없이 일을 해도 꿈은 없었다. 꿈은 꿈으로 끝난다. 꿈은 전진하지 않는다. 꿈길밖에 길이 없다면야 모르지만, 꿈은 꾼다고 해서 꾸어지지 않는다. 꿈에서조차 이룰 수 없는 꿈은 이미 꿈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꿈은 소멸되고 자꾸 놀고 싶어진다. 어릴 적 놀지 못했던 그 아련한 상실감이, 어른이 된 지금 더더욱 강렬해진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점점 더 줄어드는 것에 대한 초조함이다. 세월은 가고, 유희(遊戱)의 시간은 분초를 다투며 절박해지고 있다.

▶"아빠의 꿈은 뭐야?"(너희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 "아니, 아빠의 꿈?"(그래. 너희들이 건강하게 잘 사는 것. 너희들이 꿈이니, 내 꿈은 없는 거야.) 이것이 지금 아빠들이 살아가는 법이다. 놀이와 유희를 잃어버린 아빠들의 세상은 재미가 없다. 물론 재미있게 살려고 하니까, 더 재미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놀고 싶을 때, 놀 수 있는 아이들의 시선이 부럽다. 놀아주지 않아도, 신나게 놀 수 있는 아이들의 시간이 부럽다. (어쩌면 ‘노동’ 같은 공부에 시달리게 만든 어른들의 삿된 꿈이 더 슬픈 중노동일 테지….) 저물어가는 태양의 흑점을 보며, 또 다시 떠오를 내일의 태양을 그려본다. 내일은 ‘아이들처럼’ 놀고 싶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