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국 원 침례신학대학 총장
[화요글밭]

'골목'이라는 단어에는 다른 어느 나라 말로도 번역될 수 없는 특별한 문화적 체취가 담겨져 있다.

어느 시인의 유명한 말을 흉내 낸다면 어릴 때 우리들 삶의 팔할(八割)이 골목길에서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골목쟁이들과 떼를 지어 뛰어놀던 골목대장이 책가방을 메고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고, 제법 덩치가 커지면 으슥한 골목구석을 찾기 시작한다. 사춘기가 되면 신촌블루스의 '골목길'을 들으면서 괜스레 자기 마음을 노래하는 것 같다고 한 번쯤 깊은 한숨을 토해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 삶의 기억에는 수많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 어두운 골목에서 짧은 이별을 아쉬워하던 수많은 연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부부가 되어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골목을 지나 먹자골목으로 외식을 나간다. 살다보면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같이 절망적이던 때도 있었지만 죽을힘을 다해 이겨낼 수 있던 삶이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 없어 점점 더 뒷골목으로 밀려나고 마는 것이 우리네 삶의 법칙이다.

골목에서 시작해서 골목으로 끝나는 인생이기에 우리나라 말에서 '골목'이 지니는 문화적 의미의 중량감은 다른 어떤 언어로도 가늠하기 힘들다. 최근에 큰 인기를 얻었던 ‘응답하라 1988’ 연속극은 시청자들에게 바로 '골목'의 추억을 되찾아 주는데 성공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30년전 쌍문동 어느 골목안 이웃들의 이야기가 큰 공감을 얻게된 것은 우리 가슴 속에 잠자고 있던 골목에 대한 향수가 일깨워진 요인도 있었을 것이다. 출생의 비밀이나 불륜이 없어도, 드라마틱한 연극적 작위성이 없어도 이렇게 재미있고 감동적인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기쁨을 선물한 작품이었다. 예를 하나 든다면 눈발이 시나브로 내리기 시작한 저녁 밥상머리에서 동네에서 가장 무뚝뚝한 경상도 홀아비가 청혼 아닌 청혼을 한다.

"선영아, 날씨도 추운데 고마 우리 같이 살자."

요즘 연인들의 그 어떤 화려한 프로포즈 이벤트보다도 깊은 진심이 담겨있었기에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물론 ‘응팔’에도 현실과 동떨어진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이 숨어있다는 지적도 있다. 골목친구 다섯 명이 어려서부터 한 골목에서 대학갈 때까지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인지 모른다. 전세기간이 2년이라서 계속 이사다닐 수밖에 없는 도시의 빡빡한 현실은 성장기를 같이 나눌 친구를 사귀기 어렵게 만든다. 그나마 6개월마다 전세집을 옮겨야했던 옛날에는 아예 짐을 풀지 않고 지내는 경우도 있지 않았던가.

이웃들끼리 서로 아끼고 위로하는 쌍문동 이웃사촌 이야기가 비현실적이라고 꼬집는 사람도 있다.

요즘같이 층간소음 문제나 주차문제로 이웃을 살인하기까지 하는 세상에서 볼 때는 무슨 요순(堯舜)시대 이야기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는 푸념이다. 20층, 30층까지 쌓아올린 아파트에서 층층이 칸칸마다 나누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지만, 우리의 마음 한 구석은 아직도 이웃끼리 함께 말과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그 시절, 그 골목길을 그리워한다.

엘레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내려서 후다닥 집에 들어오지만, 그래도 ‘응팔’을 보며 사람사는 훈훈한 냄새가 그윽하다면서 감동한다. 그러고 보니 아파트의 엘레베이터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의 새로운 골목길이지 않을까?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골목! ‘응답하라 2016년!’ 응답하자,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던 골목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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