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경아는 키 155㎝, 가슴둘레 78㎝, 몸무게 44㎏의 가냘픈 육체를 가진 첫사랑 같은 존재였다. 1988년, 젊은 남자들은 술집에서 '경아를 위하여'를 외치며 건배했다. 첫사랑은 눈이 머는 것이다. 정작 매달려 있을 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데, 항상 숯검정처럼 속이 타들어간다. 모든 게 폐허다. 수많은 칼과 창의 서슬에 찔려 가슴을 부여잡는다. 두려움이 칭칭 다리를 감아 몸이 석고처럼 굳는다. 첫사랑은 뜨겁지만, 냉혹하다. 격정적인 그리움 뒤엔 절멸의 상처가 있다. 그 상처 때문에 극적인 하룻밤은 비참하다. 그래서 '맞사랑'보다 '짝사랑'이 편리한지도 모른다. 상대를 맘대로 고를 수 있고, 돈도 시간도 안 들고, 끝내고 싶을 때 끝낼 수 있으니까….
▶첫눈은, 모두가 조용히 잠든 밤에 몰래 내린다. 왔다갔는지도 모른다. 첫눈은 향기부터가 다르다. 풋내가 난다. 빛깔도 다르다. 눈인지, 비인지 모를 변덕에 속아 모두들 정처 없이 취한다.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은 대부분 오지 않는다. 시간 속에서, 시간이 풍화될 뿐이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고, 그 첫사랑은 세월이 지나도 기억창고에서 분화되고 침식되면서 다시 기억된다. 첫사랑은 아주 좋은 감정으로만 포장돼있다. 왜 오지 않을 사랑에 매달리는가. 구차하다. 첫사랑처럼 '사랑' 같지 않은 사랑도 없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담쟁이 덩굴 잎이 다 떨어지면 자기의 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한다. 같은 집에 사는 친절한 늙은 화가는 나뭇잎 하나를 벽에 그려 진짜 나뭇잎처럼 보이게 해준다. 그 '잎새'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오롯이 생의 충동을 살린다. 처음 보았던 그 잎새의 ‘끝’은 없다. 관형사 '첫'이 주는 청량감은 애틋하다. 첫 월급, 첫 데이트, 첫차, 첫눈, 첫 몽정, 첫 섹스, 첫아기…. 하지만 '첫'은 흔적을 남기며 분열한다. 그 흔적은 시간이 지나도 흔적이다. 겨울의 '초입'에서, 올해의 '종점'에서 첫사랑은 저만치서 슬금슬금 걸어오고 있다. 응답하라 1988.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