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올해도 어김없이 '끝'은 오고야 말았다. 12월은 마지막이고 절정이다. 절벽 끝에 외롭게 버티고 서서 밤하늘을 향해 길게 내지르는 늑대의 울음 같다. 그 속에 절대 고독과 생의 쓸쓸함이 더해진다. 그래서 눈물이다. 내일이면 전선(戰線)으로 떠나야하는 병사들이 뜬눈으로 지새워야 하는 마지막 밤, 막차를 놓쳐 정거장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밤의 ‘끝’은 두렵고 공허하다. '마지막'인줄 알면서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은 누구에게도 처연하고 비장한 것이다. '첫사랑'은 끝을 전제로 시작되고, '끝'인줄 알면서도 시작된다. 1988년, 첫사랑이 떠나갈 때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이 보였기 때문이다.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경아는 키 155㎝, 가슴둘레 78㎝, 몸무게 44㎏의 가냘픈 육체를 가진 첫사랑 같은 존재였다. 1988년, 젊은 남자들은 술집에서 '경아를 위하여'를 외치며 건배했다. 첫사랑은 눈이 머는 것이다. 정작 매달려 있을 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데, 항상 숯검정처럼 속이 타들어간다. 모든 게 폐허다. 수많은 칼과 창의 서슬에 찔려 가슴을 부여잡는다. 두려움이 칭칭 다리를 감아 몸이 석고처럼 굳는다. 첫사랑은 뜨겁지만, 냉혹하다. 격정적인 그리움 뒤엔 절멸의 상처가 있다. 그 상처 때문에 극적인 하룻밤은 비참하다. 그래서 '맞사랑'보다 '짝사랑'이 편리한지도 모른다. 상대를 맘대로 고를 수 있고, 돈도 시간도 안 들고, 끝내고 싶을 때 끝낼 수 있으니까….

▶첫눈은, 모두가 조용히 잠든 밤에 몰래 내린다. 왔다갔는지도 모른다. 첫눈은 향기부터가 다르다. 풋내가 난다. 빛깔도 다르다. 눈인지, 비인지 모를 변덕에 속아 모두들 정처 없이 취한다.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은 대부분 오지 않는다. 시간 속에서, 시간이 풍화될 뿐이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고, 그 첫사랑은 세월이 지나도 기억창고에서 분화되고 침식되면서 다시 기억된다. 첫사랑은 아주 좋은 감정으로만 포장돼있다. 왜 오지 않을 사랑에 매달리는가. 구차하다. 첫사랑처럼 '사랑' 같지 않은 사랑도 없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담쟁이 덩굴 잎이 다 떨어지면 자기의 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한다. 같은 집에 사는 친절한 늙은 화가는 나뭇잎 하나를 벽에 그려 진짜 나뭇잎처럼 보이게 해준다. 그 '잎새'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오롯이 생의 충동을 살린다. 처음 보았던 그 잎새의 ‘끝’은 없다. 관형사 '첫'이 주는 청량감은 애틋하다. 첫 월급, 첫 데이트, 첫차, 첫눈, 첫 몽정, 첫 섹스, 첫아기…. 하지만 '첫'은 흔적을 남기며 분열한다. 그 흔적은 시간이 지나도 흔적이다. 겨울의 '초입'에서, 올해의 '종점'에서 첫사랑은 저만치서 슬금슬금 걸어오고 있다. 응답하라 1988.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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