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 그러려면 겨울만의 온도가 필요하다. 물과 얼음 사이의 평형온도 0℃가 되지 않으면 겨울이 아니라, 가을이 미처 떠나지 못한 것이다. 가을은 가을답게 떠나야하고, 겨울은 겨울답게 와야 한다. 그래서 빙점(氷點)은 액체를 고체로 만들겠다는 극한온도의 접점이다. 인간과 계절 사이에 흐르는 이 냉소적인 온도차는 결국 마음의 온도를 쥐락펴락한다. 차디찬 겨울은 바람의 온도로 알 수 있다. 필경, 바람엔 가을이 미처 담지 못한 여름날의 기억들이 묻어있다. 그래서 붉은 낙엽마저도 푸른 삼투압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겨울을 온전히 껴안은 사람들의 가슴에 바람이 분다. 따뜻한 국물이 필요한 때다.

▶20대 청춘의 어느 언저리에서, 그것도 차디찬 자취방에서 라면을 먹고 있으면 웃음이 피식 나왔다. 눈물 같은 웃음이었다. 어쩌면 비참함을 숨기기 위한 반어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라면도 가난했고, 먹는 자도 가난했다. 라면도 외로웠고, 먹는 자도 외로웠다. 라면처럼 가난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음식은 흔치 않다. 시골에서 용돈이 오면 제일 먼저 라면을 샀고, 라면이 떨어지면 '라면 같은 라면'을 먹었다. 국수 7할에 라면 3할을 섞은 것이다. 라면 같기도 하고, 국수 같기도 한 이 정체불명의 맛을 보면 또 웃음이 나왔다. 면은 국수 맛, 국물은 라면 맛이었다. 어떤 날엔 한 끼에 라면 2~3개를 먹어치우기도 했다. 골방처럼 어둡고 퀴퀴한 그 창백한 국물이 마음 깊은 곳까지 위로한 까닭이다. 라면은 간식이 아니라 절박한 끼니였다.

▶'라면'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건 예나지금이나 똑같다. 피크닉 갈 때도 라면부터 챙기고, 주전부리가 생각날 때도 과자보다 생라면을 씹는다. 특별하지 않은 음식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라면가닥에 붙어있는 맵짜면서도 애달픈 감상 탓이 크다. 팅팅 불어터진 면발을 보노라면 마치 불어터진 심보 같다. 그 짭조름한 감칠맛은, 저렴하고도 습관적인 맛이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끓여야 더 맛있고, 배가 불러도 밥을 말아먹어야 끝이 나는, 그 지난한 마무리는 습관이 아니라 위로다. 그 가난한 맛은 내 정서와 닮았다.

▶아들이 아르바이트 첫 월급으로 라면을 사주었을 때 그 '진부한 선물'에 감격했다. 그 '애틋하고 짠해서' 목 넘김이 안 되는 해쓱한 국물을 보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국물을 먹어야 슬픔이 가라앉는 건 유년의 식성이다. 라면에 갖은 식재료를 넣지 않는 것도 그때의 입맛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잊지 않기 위해서다. 라면을 보면 돌아보게 된다. 먹고 살기 힘들어 라면조차 맘대로 먹지 못했던 과거와, 라면만큼은 맘대로 먹을 수 있는 현재의 기억을 즐기는 것이다. 라면에 관한 소고는 혼자서 절망을 씹고, 외로움을 씹고, 눈물을 삼키던 값싼 운명과도 연결된다. 나를 눈물겹게 하던 그 맛, 꼬불꼬불 맹장을 뒤트는 유한의 욕망이, 겨울이면 더더욱 생각난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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