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난 때때로 외로움을 토로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 아닐진대 마음의 중력이 무시로 가볍다. 그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필시 외딴집에 오래 산 DNA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생의 절반을 이웃과 이웃하지 않고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외로움은 지병처럼 쉽게 떠나지 않는다. 두려운 일은, 바로 그 두려움을 스스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유배지가 아닌 곳에서 유배의 느낌으로 산다는 건 슬프다. 혈연공동체의 이 병약한 징조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스스로의 자학일 뿐이다. 그리움의 감정은 습지대 늪처럼, 썰물 때의 갯벌처럼 한번 발을 넣으면 좀처럼 빼내기 어렵다. 그럴 땐 내가 나에게 악착같이 변명한다. "그래, 이건 외로운 게 아니라 외로운 척 하는 거야…."

▶제비는 빈집에 집을 짓지 않는다. 사람 출입이 적은 뒷벽에도 둥지를 틀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출입구 쪽에 집을 짓는다. 천적으로부터 새끼들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비는 귀소성이 강해 여러 해 동안 살았던 집으로 다시 온다. 그리고 공짜로 추녀를 내어준 집주인에게 6개월 둥지를 또 빌린다. 길조(吉鳥)로 여겨왔던 인간은 제비가 보금자리를 트는 것을 좋아하고, 새끼를 많이 치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사람이야말로 제비들의 막강한 우방이자 운명공동체다.

▶이상하게 퇴근할 무렵이면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주변을 염탐한다. 인생에서 여러 번 깨져봐서 굳은살이 박인 줄 알았지만 여전히 연습중인 것이다. 연습은 언제라도 중단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난 보편적으로 삶의 겉치레와 허명을 싫어한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면 극히 이기적이다. 공동운명체가 아니라 개인운명체다. 그들은 부나비처럼 불 옆에 가지 않는다. '너를 안아주려고 불타는 것이 아니라 너를 태워서 삶을 앗아가려고 하는 것'임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동체의 내밀한 규칙이나 관습, 묵계에서 줄행랑을 치곤 한다. 그 정신의 가벼움은 영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둔한 행보다. 지금 겪는 일이 싫어서 도망치는 것보다 겪으면서 그 느낌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 물에 빠진 놈은 더 밑으로 내려가 바닥을 차고 나와야 한다.

▶모두가 외롭고 불안한 시대다. 문제는 가족·공동체가 약해지고 개인이 파편화됐다는 점이다. 어쩌면 곁에 있는 사람은 같이 가야할 이웃이 아니라, 불편하고 위험한 이웃이다. 일사불란한 사회로부터 소박맞은 자들은 오늘도 남의 등 뒤에서 물정 모르는 얘기들을 한다. 그래서 애걸복걸하는 사람에게 구걸하지 않으려면 능멸하는 자를 능멸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게 아니다. 삶의 여유를 물외에서 누리고 싶다면 '내'가 아니라 '우리'여야 한다.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은 모두의 '하루'다. 반복을 견디는 게 삶이다. 튀어봤자, 하루 세끼 먹을 뿐이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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