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을 붕대로 가린들 투명인간이 될 수는 없다. 그놈이 그놈인 것을 모두들 안다. 투명인간이 된다는 건, 욕망을 방해하는 갑갑한 시스템과 작별하는 일이다. 내가 무얼 보든, 무얼 먹든, 무슨 짓을 하든, 막을 사람은 없다.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투명인간이 돼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걸 고르라면, 여자 목욕탕에 들어가는 일과 은행(銀行) 터는 일일 것이다. 시험 문제지를 도둑질하고,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미워하는 작자를 혼내주는 일 따위는 후순위다. 투명인간이 되고 싶은 이유는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권력이 '투명인간'이 되면 절대 권력이 되고, 절대 권력은 또 다른 절대 권력을 낳는다.

▶세계적인 도시락 전문점 '스노우폭스'를 이끄는 김승호 JFE 대표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다. 그는 공정서비스 권리 안내문에서 당당하게 선언했다. "우리 직원이 고객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다면 직원을 내보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직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시면 고객을 내보내겠습니다. 우리 직원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존중 받아야 할 훌륭한 젊은이들입니다. 직원에게 인격적 모욕을 느낄 언어나 행동, 큰 소리로 떠들거나 아이들을 방치하여 다른 고객들을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하실 경우에는 저희가 정중하게 서비스를 거부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손님은 왕이라며 허세 부리는 갑질 고객에게 고한 이 일침은, 투명한 사회로 가기 위한 통렬한 호소다. 하루 종일 뭉클했다.

▶요즘 투명인간은 '안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존재감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 투명인간은 익명성이다. '나를 좀 봐 달라'는 하소연에도 타인은 좀처럼 봐주지 않는다. '내가 거기에 있다'고 손짓해도 다가오지 않는다. 중산층 몰락, 비정규직, 청년실업, 이 불안정한 ‘하류사회’는 안 보이는 투명인간에 대한 갈망과 눈에 띄지 않는 투명인간을 양산하고 있다. 가시밭길에서 살지언정 타인만큼은 꽃길을 가도록 배려했던 이들마저 해 저문 인생의 벼랑으로 떠밀린다. 춥고, 배고프고, 아파도, 끙끙대며 하루를 살아가는 투명인간들…. 단 1분이라도 '안 보이는' 투명인간이 되고 싶은 것은 힘들이지 않고 돈을 벌거나, 힘들이지 않고 미색(美色)을 탐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이런 발칙한 상상들은 바로 절름발이 사회가 나은 망상이다.

▶인간은 잔혹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뼈를 이용한 무기로 살해하는 법을 익혔다. 베이징원인은 두개골에 구멍을 내어 뇌를 파내는 식인종이었고,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 역시 동족을 잡아먹는 식인종이었다. 인간의 선행과 구제, 자비와 평화는 막간에 잠시 비치는 햇빛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세상살이는 더 잔혹하다. 우린 '보이지 않는' 진짜 투명인간이 되고 싶다. 이는 악당이 되거나, 악당을 응징하고 싶어서다. 한없이 슬픈, 이 불온한 상상은 편하게 살고 싶은 이 시대의 눈물이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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