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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당신:꽃잎보다 붉던’ 펴낸 영원한 청년작가 박범신

[나재필의 feel] “사랑만이 굴종하고 싶은 최상의 권력 … 문학은 보고 상처받고 꿈꾸는 것”
논산·강경은 나를 만든 문학적 자궁
장인어른 치매보고 작품 ‘당신’ 구상
사랑은 죽음을 앞두고 완성되는 것
죽기전까지 사랑의 빚 갚고가야 돼
작품 ‘은교’는 에로가 아닌 순애보
늙었다고 사랑하고 싶지 않겠는가

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 2015년 11월 03일 화요일 제11면     승인시간 : 2015년 11월 02일 20시 01분
▲ 등단 42년 동안 장편소설 42권을 출간한 박범신 작가는 최근 ‘당신:꽃잎보다 붉던’을 펴냈다. 그는 평생 문학 순정주의, 인간중심주의라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지키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사흘밤낮을 설렜다. 왜 첫사랑의 연애처럼 오롯이 떨렸을까. 절기의 끝에서 은행잎이 바람나게 사무치던 날, 와초(臥草) 박범신(70) 작가를 만났다. 일본 커피장인, 호리구치 토시히데의 커피 볶는 향기가 진한 '코너스톤H(대전 도룡동)'에서였다. 최근 와초는 마흔두 번째 소설 '당신: 꽃잎보다 붉던'을 펴냈다.

-고향 논산(강경·연무대)에는 자주 오나.

"일주일에 2~3일은 묶는다. 고향은 첫 마음이고 첫사랑이자 어머니다. 늙어서 유유자적하고, 무위자연하려고 내려온 것은 아니다. 열심히 소설을 써보려 하니까 환경이 바뀌어야겠더라. '함께 걷는 소풍' 행사를 하며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문학과 삶, 고향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한다. 나를 만든 8할은 고향이다."

-어린 시절은 어땠는가.

"어둠만 가득했다. 가난했고 외로웠다. 자나 깨나 동구 밖에 나와 강경, 논산 사이의 넓은 들판을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봤다. 가장 큰 소망은 기차를 타고 보이지 않는 곳, 산 너머, 언덕 너머, 벽 너머, 어둠 너머로 가보는 것이었다. 그곳이 궁금하고 그리웠다. 어쩌면 그런 꿈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의 마음은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느냐는 갈망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초월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현상 너머, 죽음 너머의 세계가 궁금하다. 인간의 보이지 않는 내면, 가닿을 수 없는 초월적 세계에 대해 욕망 말이다."

-학창시절 얘기를 들려달라.

"학교를 공치고 강경포구 갈대밭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책을 읽은 적이 많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년까지 매일 한 권씩은 읽은 것 같다. 수업시간에도 교과서 안에 책을 놓고 소설을 읽었다. 성적은 묻지 마라. 젊을 때 뭔가 내가 미칠 수 있는 것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다. 강경은 글을 쓰게 만든 문학적 자궁이다."

-원래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22살에 교편을 잡았다. 당시 2년제였고, 등록금도 쌌다. 그런데 무주에서도 가장 오지로 발령이 났다. 하숙방에 들어오면 아무것도 없었다. 뭐랄까, 유배된 느낌, 소외된 느낌이었다. 그래서 원광대 국문과에 편입했는데 아내를 만났다."

-2년 만에 내놓은 신작은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사이의 슬픈 시간 여행을 그렸다.(인터뷰 이틀 전, 난 이 책을 구입해 단숨에 읽었다.)

"언뜻 보면 노인의 삶과 죽음이 큰 얼개지만 본질적으로는 순애보다. 소설 주인공들은 치매와 죽음 앞에서 마침내 사랑에 성공하고 공평한 지점에 이른다. 젊은 날 헌신해서 행복하게 끝나는 건 순애가 아니다. 사랑했지만 너무나 과오가 많았던 사랑에 대한 회한, 성찰, 반성이 죽음을 맞는 자세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소소하게 얹혀 있는 삶을 이해해야한다. 사랑은 죽음을 앞두고 완성된다."

-소설의 모티브는.

"장인어른(92세 작고)이 돌아가시기 전, 치매를 앓으셨다. 증상 중 특이한 건 깊은 밤에 가족들이 잠들면 거실로 나와서 뭔가 큰 소리로 외쳤다는 점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소리는 가족들에게 소음이었다. 하지만 난 장인어른이 세상에 대고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털어놓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시대의 어른들은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하지 못하고 견디며 살았잖은가. 소음으로 들렸던 그 말들이야말로 그 분이 평생 가슴에 간직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가수 최백호 씨의 '꽃잎보다 붉던 내 젊은 시간은 지나고'라는 노래도 플롯에 도움을 줬다."

-사랑이란 기계적으로 공평한 것이어야 하나.

"시간차가 나더라도 양자가 서로에게 똑같이 마음을 주고받아야 한다. 사랑은 다 갖고 싶지만 또 주고 싶은 것이다. 창과 방패 같은 것이기 때문에 완성될 수는 없지만, 함께 살려면 모순된 감정에도 합일이 필요하다. 주고받는 사랑의 크기가 동일하지 않을 때 윤리의 문제가 발생한다. 죽기 전까지 사랑의 빚을 다 갚고 가는 게 순애의 윤리다."

-당신이란 호칭은 많은 걸 내포하는 것 같다.

"함께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더께로 얹혀 곰삭은 말이, 당신이다. 그래서 수평적인 호칭이자, 눈물겨운 낱말이다. 물론 아내만을 국한하는 건 아니다. 이웃, 자식, 부모도 들어있지 않겠나."

작가는 사랑만이 굴종하고 싶은 최상의 권력이자 참된 권력이라고 했다. 때문에 평생, 사랑을 찾아 헤맸다고도 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 또한 아내와 평생 불공평한 관계 속에 살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자주 외박을 하면서도, 아내가 어둑해질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버럭 화를 내곤 했다는 것이다. 영원하고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갈망, 그러나 결코 그 지점에 다다를 수 없다는 슬픔, 이 두 감정은 작가 박범신의 문학을 지금껏 이끌어온 화두이자 에너지다. 그는 슬픔 속에서 희구하고, 갈망 속에서 상처를 본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상대의 그늘(고통)을 보는 거지, 가진 것을 보는 게 아니다. 요즘은 상대가 가진 것을 본다. 미모, 돈, 학벌, 집안, 이런 것만 본다. 가진 것을 보고 사랑하면, 가진 것이 사라졌을 때 사랑은 깨진다. 상대와 내가 수평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은 불완전하다."

-'은교'도 러브스토리였다.

"소설과 영화는 다르다. 영화는 오직 발가벗겨진 정사(情事)에만 초점이 맞춰져있다. 하지만 난 순애보라고 생각하고 썼다. 사실상 권위의 갑옷을 벗고 쓴 작품이다. 노년에게도 꺼지지 않는 욕망이 있고, 그걸 솔직하게 발가벗긴 것이다. 진솔해지고 싶었다. 노년엔 사랑을 하면 안 되는가. 노년엔 섹스를 하고 싶지 않은가. 사실 노인이 욕망하는 것은 열일곱 살 처녀의 육체가 아니다. 불멸의 젊음을 욕망한 거다. 영원히 늙지 않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람, 영원히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 말이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에서 태어나 신춘문예 당선까지 강경에서 살았던 그는 몇 년 전 다시 고향에 집필실을 마련했다. 탑정호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평생 고향 금강에 기대 살았고 다시 금강의 품에 안긴 것이다. 현관에 건 글귀는 '홀로 가득차고 따뜻이 비어있는 집'이다. 홀로 치열하게 쓰고, 더불어 누린다는 뜻이다.

-1993년 갑자기 절필선언을 했다.

"한 인간으로서의 나, 작가로서의 나, 독자들이 이미지로 갖고 있는 소문으로서의 나는 각각 너무 멀다고 느꼈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나 사이도 그러했다. 너무 외로웠다. 베스트셀러 시장을 다 버리고 새로 태어나고 싶었다. 3년 동안 용인 외딴집에 은거해 오로지 혼자 지냈다. 독자들이 나를 잊기 바랐던 시기였고, 유명작가로서 얻은 기득권이 해체되길 기다린 시기였다. 절필은 작가로서 일종의 자기죽음의 선언이다. 나날이 죽고 싶었고 새로 태어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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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작가라는 호칭을 듣고 있다.

"머리는 날이 갈수록 하얘지는데 가슴은 날이 갈수록 붉어진다. 여전히 감수성과 순정이 청춘 이상이다. 마음은 색동옷을 입고 있는데 몸이 늙어가니 슬프다, (허허) 세상엔 여전히 너무 많은 것들이 부족하고, 삶 자체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발견하고, 느끼고, 감정이입해서 나의 슬픔, 나의 상처로 할 수만 있다면 글감은 떨어지지 않는다. 삶에 대해 뜨겁게, 마음 아프게 볼 수 있는 순정을 가져야한다. 신문 한 줄에도 장편 소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다작(多作)을 하고 있다. 지치지 않나.

"오히려 안 쓰면 굉장히 우울해진다. 소설은 나한테 밥 같은 거라, 안 먹으면 죽는다. 살기 위해선 계속 쓸 수밖에 없다. 글을 쓰면 놀라울 정도로 내 자신을 장악하게 된다. 평생 그렇지만 어떻게 문학적으로 나 자신을 긴장시킬 것인가 고민했다. 매우 안정되고, 행복했다면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불편하고, 불안하고, 행복해지지 않는 것이 글을 쓰게 했다."

그는 등단 42년 동안 장편소설 42권을 냈다. 1973년 등단 이후 한 해 한 권꼴로 장편을 내놓은 것이다. 물론 틈틈이 중단편과 산문도 발표하며 바지런히 살아왔다. 그의 작품 25편 정도는 영화나 드라마화 됐다.

-어느 인터뷰에서 행복하지 않다고 하던데.

"한 번도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 인생이었다, 환경적으로 불행해서가 아니라 내 감수성에 비치는 세계는 여전히 불온하고, 광기로 가득 차 있고, 상처투성이였다. 작가는 자신이 사는 시대가 가장 위험한 시대라고 가슴 아프게 느끼는 존재다. 문학은 행복에서 오는 건 아니다. 글을 쓴다는 건 자기 구원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학은 상처에 예민하거나 상처를 오래 간직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결핍에 예민한 사람들이 문학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평생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지키며 살아왔다. 하나는 문학 순정주의. 아직도 설레고 떨린다. 두 번째는 인간중심주의다. 다시 말해 휴머니즘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사랑이나 부부 관계조차도 자본의 욕망 체제 아래에 놓여 있다. 젊은이들도 그렇고 나이 든 분들도, 상대편이 무능하거나 가진 게 없거나 상처가 많으면 견디지 못한다."

-젊음은 아름답지만 늘 위태롭다.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젊음은 어느 시대든 불안한 거지만, 젊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을 에너지도 함께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 자기정체성만 확인한다면 벽을 넘어갈 수 있는 에너지를 자기 내부에서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우리네 인생은 부끄럽고 민망하단 이유로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산다며, 자본이 장악한 세상에서 자본의 노예처럼 살다보니 사랑한다는 표현도 잘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보고(그늘진 것, 결핍된 것), 상처 받고, 꿈꾸는 것이다. 사람의 주성분은 사랑이다. 문학은 사람이고 사랑이다. 내 나이가 일흔이 됐지만, 작가 생활 42년은 한 번의 열렬한 연애처럼 흘러갔다. 돌아보니 문학이 내 영혼의 방부제였던 것 같다. 문학,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다."

사랑의 끝엔 무엇이 있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그야 당연히 사랑이 있지'라고 말하는 늙지 않는 와초(臥草·풀잎처럼 눕다), 그는 눕지 않고 분연히 일어선 몇 안 되는 현역작가다. 대한민국에게 책 좀 읽으라고 강권한 그는 문자(매체)의 힘은 절멸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는 청년보다 젊었고, 꽃잎보다 붉었다.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신작 소설과 함께 박범신 작가의 문학 인생 42년을 망라하는 책들도 함께 나왔다. 중단편전집과 작가의 문학적 연대기를 정리한 책 '작가 이름, 박범신'이다. '토끼와 잠수함' '흉기' 등 모두 7권에 이르는 전집은 1973년 신춘문예 데뷔작부터 2006년 작품까지 85편을 묶었다. 전집엔 1973년 데뷔 이래 꾸준히 써온 중단편 85편이 수록됐다. 문학앨범은 강연문, 인터뷰, 좌담, 비평문 등으로 구성한 작가의 문학 연대기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박상수 시인이 엮었다.

◇약력=△1946년 충남 논산 연무 출생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여름의 잔해'로 등단 △'73그루프' 동인 활동 △1981년 '겨울강, 하늬바람'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 △1995~2004년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2007년 KBS 한국방송공사 및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명지대학교 명예교수 △현 상명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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