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설거지란 말은 왜 이리 슬플까.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섬섬옥수를 저며 와서 그럴지도 모른다. 설거지는 하루의 얼룩들을 씻어내는 씻김굿이다. 우린 한평생(결혼생활 60년·하루 평균 60분 기준) 설거지에만 2만1600시간(900일)을 바친다. 자그마치 2.4년이나 부엌 개수대 앞에 서있는 것이다. 삼시세끼 후 쏟아내는 그릇들은 산더미다. 네 식구 기준이면 밥그릇·국그릇만 8개요, 반찬그릇 데커레이션도 10여개를 넘는다. 프라이도 하고, 생선까지 굽는다면 이제 설거지는 허드렛일이 아니라 노동이다. 맞벌이 시대, 남자들은 세차를 핑계로 설거지를 피하고, 여자들은 설거지를 핑계로 싱크대 앞을 떠난다. 결국 설거지는 여자나 남자에게 있어서 난분분한 숙명이다. 우리나라 남성의 가사 분담률은 20%를 조금 넘는다.

▶설거지의 제1원칙은 기름 묻은 그릇과 묻지 않은 그릇을 구분하는 일이다. 설거지통에 기름 묻은 것을 포개놓으면 그릇 모두가 기름투성이가 된다. 때문에 오염되지 않으려면 오염된 것을 경계해야한다. 기름진 음식은 먹을 때만 탐나고 뒤치다꺼리가 힘들다. 설거지는 음식찌꺼기와 그릇의 어둠을 지상에서 말소시키는 작업이다. 무한의 그릇은 밥과 국물을 품다가, 결국 버려질 것들만 남긴다. 그래서 애벌의 그릇을 남겨둬서는 안 된다. 귀찮아서 설거지를 미루면, 질량불변의 법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누군가 먹으면 누군가는 치워야한다. 그런데 대부분 먹는 자는 불량한 정치요, 치우는 자는 불쌍한 국민들이다.

▶야당 원내대표가 대통령에게 '그년'이라고 욕을 했다. 나중에 대통령이 따져 묻자 '그년'이 아니라 '그녀'의 오타라고 해명했다. 이제 초등학생 꼬마들도 '이년, 저년'하며 능멸한다. 교과서 국정화고 나발이고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오종종하거나 좀스러운 좌익과 우익, 진보와 보수, 남과 북, 민주와 반민주, 영남과 호남과 같은 갈등이 빚어낸 지병들이다. 정권의 떨거지들은 찧고 까부르면서 갖은 오물을 토해낸다. 기름지게 퍼준 정책들일수록 뒤끝이 좋지 않다. 그 불의와 안일의 얼룩은 오래 닦아야한다. 누군가는 싸고, 누군가는 닦아야만 하는 이 데데한 ‘설거지’를 우린 불행이라고 말한다.

▶흠이 나지 않게 세상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인생에 깊은 슬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슬픈 주파수를 보낸다. 씻는 사람과 씻어야 할 사람은 분명치 않지만, 씻지 않으면 썩는다. 결점은 닦는 게 아니라, 도려내는 것이다. 자국처럼 박혀있기 때문이다. 설거지는 세척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정리다. 그런데 싸놓고 치우지 않는 작자들 천지다. 그들에게는 접두사 ‘개’를 붙인다. 개는 치우지도 않을뿐더러 먹기도 한다.(식분증) 오염된 세상을 반지르르하게 닦고자 한다면, 먼저 본인의 그릇을 닦는 게 순서다. 새벽녘, 설거지를 끝내며 오사바사한 어둠을 삼킨다. 언젠가, 개수대에도 꽃은 필 것이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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