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새벽 4시에 잠이 깼다. 그런데 사실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잠 못들었다는 것이 팩트다. 눈만 감고 있었지, 의식은 내내 깨어있었다. 물론 잠을 자기 위해 자정부터 엄청난 공을 들였었다. 생각의 다산(多産)은 불면을 부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오지랖 넓게) 가뭄걱정도 하고 역사교과서 걱정도 했다. 22조원이나 처들인 4대강도 떠올랐다. 강을 판 것인지, 운하를 판 것인지 도통 모를 그 미증유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한 백성의 망상이 당최 옴나위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새벽 4시20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윗집 ○○씨의 소피보는 소리와 물 내리는 노이즈(noise)를 본의 아니게 듣고 잠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층간소음이라고 하기엔 석연찮은, 불면의 해프닝에 그냥 웃었다.

▶아파트 현관 밖으로 나왔다. 새벽의 몽진(蒙塵)은 차가웠다. 어둠과 밝음의 경계는 더욱 짙다. 모두들 의식을 끄고 자고 있는 사위는 적요하다. 몇몇 사람들이 칠흑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벌써 전쟁터 같은 삶으로 참전한 이들이다. 어쩌면 밤은 낮보다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헬스장 안은 낮처럼 들썩인다. 이들도 나와 같은 불나방들일까. 아님, 힐링(healing)과 킬링(Killing) 사이에서 달달한 밤을 버린 것일까. 한참을 상념했다. 바람 같은 불을 켜고 바람 같은 근육들을 움직이는 이들에게서 나른한 권태와 뒤틀린 절망을 함께 보았다.

▶기린의 잠(하루 평균 10분에서 2시간 수면)은 초식동물의 비애다. 육식동물의 공격 때문에 렘(REM·몸은 자고 있으나 뇌는 깨어 있음) 수면을 하기 때문이다.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은 ‘사슴’이 아니라 ‘기린’이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말은 2.9시간, 코끼리 3시간, 소 4시간, 얼룩말 4.5시간, 말 8시간, 토끼 8.4시간, 침팬지 9.7시간, 붉은 여우 9.8시간, 개 10.1시간, 집쥐 12.5시간, 고양이 12.5시간, 사자 13.5시간, 갈색 박쥐 19.9시간, 수컷 황제 펭귄은 적으로부터 알을 지키기 위해 3달 동안 거의 자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런 숫자의 개념은 중요치 않다. 누가 얼마나 오래 자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오래 사느냐의 문제이기에 그렇다. 어쩌면 나도 기린일 지도 모른다.

▶다음날 새벽의 초침소리도 닭이 양푼을 쪼는 소리처럼 컸다. 귓전을 울리는 타종소리는 선문답을 쉴 새 없이 공중 부양한다. 철부지 모기는 문풍지 떠는 계절이 왔는데도 왱왱거리며 괴롭힌다. 저 흡혈귀는 언제까지 가련한 불면자(不眠者)의 피를 빨 것인가. 얼마나 더 빨아야 배가 불러 잠이 들까. 간혹 피를 실컷 먹고 배가 터져죽길 바라기도 하지만 그럴 일은 숫제 없다. 수면제 몇 알 삼키고 밤을 재우기에는 어둠이 강하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내가 나를 학대했으니 휴식을 허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그래, 차라리 잠에 굴종하자. 오늘도 내가 졌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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