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어둠속을 혼자 걸었다. 아스피린 몇 알 먹고도 가시지 않는 편두통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난 시시때때로 꽤 심한 두통을 앓곤 했다. 그때마다 혼자 걸었다. 갈 길을 정해놓지 않고 무작정 걷다보면 무슨 처방을 받은 것처럼 두통이 사라졌다. 그때 이후론 두통의 조짐만 있으면 일부러 걷는다. 걷는 것은 정리하는 행위다. 머릿속을 정리하고 몸을 정리하고 일상을 정리할 수 있다. 더욱이 어둠은 불빛의 가장자리에서 전경의 일부를 삼켜버리며 고뇌를 분쇄한다. 밤이 되면 일상의 소리가 잦아들고 생각의 데시벨이 높아지는 법이다. 감질나지만 때론 감칠맛 나는 것. 그래서 어둠은 짙어질수록 생각의 창은 반대로 밝아진다.

▶어둠속에서 술을 마셨다. 몇 날 며칠 고민거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홍어 묵은지에 소주를, 하루는 몰트위스키에 치즈크래커를 곁들여 마셨다. 식도를 넘어가며 쓴맛의 절정을 거칠게 드러내는 소주, 부드럽게 혀에 감기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갈 땐 화락(火落), 뜨겁게 타는 맛을 보여주는 위스키. 둘은 전혀 어울리지 않거나, 배타적인 사이인데도 그 맛은 친밀했다. 문제는 다음날 여지없이 찾아온 두통이다. 왜 맛있게 마시고 작파했는데도 하루 종일 비몽사몽 하는지 고통스러웠다. 사흘째 되던 날, 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지만 소주 두 잔을 마셨는데 나가떨어졌다.

▶나는 때때로 탄수화물 덩어리인 빵을 먹는다. 일부러라도 먹는다. 힘들게 운동을 하고난 뒤에도 빵 생각이 나면 빵을 먹는다. 러닝머신 위에서 30분 동안 뛴 보람이 한순간에 날아가는데도 기꺼이 빵을 우적우적 밀어 넣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단지 빵이 먹고 싶어도 먹지 못했던 그 옛날 허기가 지금도 내안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허기를 잊을 수 없다. 허기란 말은 신묘하다. 그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진짜 허기가 돈다. 배가 진짜 고픈 게 아니라, 배가 고플 것이라는 아주 영리한 기억을 유추하는 것이다. 두통이 심하면 오히려 입맛이 살아나는 건 배고파서가 아니라, 두통을 잊기 위해 가상의 대체재를 찾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잠이 들기 전에 무수한 단어들이 전광석화처럼 떠오른다. 그러면 이내 망설인다. 얼른 일어나서 메모를 할까, 아니면 내일 일어나서 옮겨 적을까. 이럴 땐 대체로 다시 불을 켜고 메모지에다 그 불특정 단어를 적어놓고 잔다. 다음날 옮겨 적는 건 게으름이자, 백발백중 실패다. 전날 밤 떠올랐던 그 단어가 당최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서 보면 더 기가 막힌다. 괴발개발, 그 어떤 글자도 명확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다. 무용지물이다. 귀찮아도 잊지 않으려면 벌떡 일어나 메모하는 것이 상책이다. 물론 메모하고, 다음날 그 메모지를 알아볼 수 없을 때 이 또한 두통이다. 두통이란 머리의 통증이 아니라 생각의 통증이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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