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고향 수안보에는 '가족탕(온천목욕탕)'이라는 게 있었다. 공중목욕탕에 다다미방 같은 작은 가족실이 여럿 딸려있는데 일제강점기 온천여관에서 비롯된 형식이었다. 조금은 부끄러울 것 같지만, 나신을 보는 게 아니라 나신을 닦는 도량이니 부끄럽지 않았다. 유리문을 열고 욕실 안으로 들어서면 뿌연 김이 자욱했고,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하늘색 타일 바닥, 온도 표시도 없는 온탕·냉탕 욕조가 달랑 2개 있었다. 섭씨 59℃짜리 온천수를 43℃로 식힌 온탕은 생각보다 더 뜨거웠고, 냉탕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차가웠다. 가족 전체가 발가벗는 목욕재계는 아낌없이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허물을 감춰주는 살가운 의식이었다.

▶목욕탕을 가는 자식에게 어머니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입욕표 받는 아줌마가 물으면 꼭 7살이라 해야 한다. 그리고 학교 안 들어갔다고 하고~." 명절 때만 되면 목욕탕은 도떼기시장이었다. 가난했던 서민들은, 1년에 고작 2~3회 정도밖에 이용하지 못했다. 때문에 한번 욕탕에 앉으면 살갗이 닳도록 밀었다. 그래서 아들의 때를 닦는 아비의 푸른 심줄은 돈 없는 일상의 아픔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곤 했다. 탕 안은 콩나물시루처럼 엉덩이 붙일 데가 없었고 동그란 의자는 고사하고 물바가지 쟁탈전도 예사였다. 이렇듯 '때 빼고 광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혼례를 치른 신혼 방을 훔쳐보는 건 간자(間者)의 재미였다.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 문을 뚫어 은밀하기 그지없는 두 사람의 공간을 훔쳐보는데 그 내밀한 욕망이 전혀 외설적이지 않았다. 여기엔 철칙이 있는데 신부의 옷고름을 푸는 극적인 장면까지가 허락된 관음이었다. 그보다 더 외설적이고 타락적인 염탐은 다름 아닌 동네 아낙들의 목욕이었다. 여름한철과 명절 때가 되면 삼삼오오 무리를 짓거나 홀로 냇가에 나와 몸을 씻었다. 아낙들은 남정네들의 시선을 따돌렸다고 생각했겠지만 대보름달이 사위를 비추면 그 나신의 그림자가 물빛 위에 떠다녔다. '유레카~' 아낙들의 목욕은 아르키메데스의 목욕보다 더 내밀한 욕망의 발원지였다.

▶가을구름은 파란 물을 흩뿌린다. 흩뿌리며 봄여름의 기억을 벗는다. 껍질이다. 껍질은 본디 몸의 기억일 뿐 그 자체로 몸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껍질은 벗어야 할 진피일 뿐 본질은 아니다. 우리가 함부로 벗지 않는 건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라 감추고 싶기 때문이다. 무언가 감추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건 분명 '남겨둘 게 있다는' 얘기다. 한꺼번에 모든 걸 보여주면 그걸로 신비로움은 멍처럼 남는다. 멍은 시간이 되면 흔적으로 남지 않고 소멸된다. 결국 벗는 것은 물질이라는 외투, 권위라는 외투, 지극히 억울한 당위성의 외투를 버리는 행위다. 한가위다. 모두들 세상의 때를 벗겨보는 건 어떨까. 가급적 동네목욕탕일수록 좋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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