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완연한 가을이다. 바람결도, 볕도 제법 냉소적이다. 가을은 1년에 4분의 1정도 할애되지만 훅 왔다가 훅 간다. 이런 좋은 날들이 오면, 있는 힘껏 가을볕의 온도를 잡아야한다. 만약 한가롭게 안부를 묻고 있다가는 별안간 겨울을 맞는다. 가을은 냉혹한 겨울의 사전답사다. 예비하지 않으면 지난 겨울의 뼈마디 시렸던 기억만이 폐부를 찌를 뿐이다. 여름의 최절정 진앙에서 벗에게 안부문자를 보낸 적이 있다. "더위 안에 있는가? 더위 밖에 있는가?" 벗은 삼매(三昧·한 가지에만 몰입함)중이라고 했다. 더위를 느낄 겨를도 없이 돈 버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래, 더위가 대수냐? 돈이 대수지!"

▶부모에게 안부전화 거는 일을 자꾸 까먹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변명도 해보고,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증빙이라며 핑계도 대보지만 어찌됐든 불충이다. 물론 전화를 걸어도 아주 요식적인 말만 하게 된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픈 데는….' 그리고 잘 지내시라며 끝을 맺는다. 오히려 내 아들이 할머니·할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자주 여쭙는다. 어떨 땐 '오래오래 사셔서 효도 받으시라'며 짐짓 애비보다 더 근사한 멘트까지 곁들인다. 얼마 전에는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가을용 스카프를 사서 선물하는 걸 보고 울컥했다. '자식보다 더 자식 같은' 아들의 행동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먼저 운다. 지극히 온당한 언행이거늘, 자주 안녕을 묻지 못해 죄스러운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안녕을 묻지만 세상은 안녕하지 못하다. 여기저기 둘러봐도 버릇없는 '것'들만 넘쳐난다. 남녀노소 할 것 없다. 오직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너’를 밟고 ‘나’만 산다. 자기만 살겠다는 것이니 서로의 안녕을 묻지 않는다. 어찌 보면 회초리를 버린 순간, 우리가 회초리를 맞고 있는 셈이다. 우리집 거실은 아랫집의 천장이다.(층간소음) 내가 미룬 일은 다른 사람의 야근이 된다.(협업) ‘나’만 편하면 ‘너’의 안녕쯤이야 하등의 문제가 안 되는 현실은 궁극의 이기주의다. 나무는 고요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그치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다.

▶밤새워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끝내 휴지통에 처박히는 연애편지는 눈물이다. 우체통에 넣기 전까지 수취인불명. 그 애절한 글귀는 생존이 불확실하다. 누군가에게 안녕을 묻는 것은 그래서 안녕을 고하는 일이다. 편지는 마음속의 감정이 밤새도록 달짝지근하게 달궈졌다가 제풀에 식어버리는 변절의 온도다. 이제는 당신이 안부를 물을 차례다. ‘밥 먹었어’라는 말에는 ‘밥’만 들어있지 않다. 요즘 잘 지내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힘든 일은 없는지 묻는 안부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안녕을 묻는다면, 당신의 안녕이 궁금한 게 아니라 자신의 안녕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땐 살짝 어깨를 빌려주라.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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