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홍철의 월요편지]<22> 배재대 석좌교수

최근 남북적십자 실무접촉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합의하였습니다. 그동안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고 북한의 군사적 도발 행위에 많은 국민들이 불안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직 어려운 고비는 상존하고 있으나 얼마 전 남북고위급 접촉에서 6개항에 대한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번 이산가족 상봉이 실현될 것으로 예상되어 일단 안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북회담이나 접촉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입북하여 김일성과 면담을 하였고, 당시 제 2인자인 김영주와 합의문에 공동서명을 하는 성과를 낸 것을 필두로, 1991년 남북 총리를 대표로 하는 고위급회담 성사, 그 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정상회담, 박근혜 정부에서는 지난번 북한의 권력실세 3인방의 인천 방문과 이번 고위급 접촉 등 남북간 현안 해결의 계기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1971년 당시 최두선 대한적십자 총재의 제안으로 남북 적십자회담이 수차례 열렸고 그 결실로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루어졌으며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그 장면을 지켜 본 세계인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1989년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 대표로 참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와 지금, 바뀌지 않은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당시 북한 측 군대표로 회담에 참여했던 김영철이 아직도 대남공작에 간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직책은 정찰총국장으로 천안함 폭침부터 이번 목함지뢰 사건까지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30년 가까이 이른바 대남사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저는 40대의 비교적 젊은 대표로서 김영철과 논리싸움을 많이 한 바 있는데 산천이 여러 번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한 가지 일을 장기간 수행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는 있으나 그 분야의 세세한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두 번째 변하지 않은 것은 남북회담에서의 북한의 기본입장입니다. 과거에 북한은 교류와 협력보다는 정치와 군사문제가 ‘가장 선차적인 문제’라고 주장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지난번 무박 4일, 43시간 진행된 고위급 접촉에서도 어휘와 표현방법은 달랐을지라도 북한의 기본 입장을 되풀이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확히 26년 전인 1989년 11월에 제가 했던 발언록을 다시 열어보게 되었습니다.

“귀측 대표들께서 정치·군사회담이 가장 중핵적이고 선차적인 문제라고 주장하셨는데, 중요한 문제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당연히)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선차적인 과제라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중략) 우리 남북관계의 여러 가지 긴장과 대결상태를 완화하는 데 있어서 우선순위는 정치·군사문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략)

지금 우리가 정치·군사회담을 하면서 무장해제나 군축을 하자고 서로 주장했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무장해제 하자’는 그 말 자체를 서로 의심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동안에 쌓여진 불신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류와 협력을 통해서 (먼저) 불신을 해소하자는 것인데 그것은 가장 현실적인 방안입니다. 서로 교류하다 보면 상대방의 의도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고 상호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군사적 일괄타결’이라는 전제조건을 고집하고 있고, 우리는 선, 교류·협력이라는 기능주의적 접근방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번 고위급 접촉에서도 상당시간 이 문제로 입씨름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씁쓸한 심정을 지울 수가 없네요.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