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학창시절의 기억은 공부보다는 노동에 방점이 찍힌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던 당시, 배꼽시계는 점심이 되기도 전에 요란스럽게 울렸다. 간간이 새참으로 실핏줄의 고단함을 풀긴 했지만 돌아서면 또 배고팠다. 뱃속에 '거지'가 산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일부러 거지처럼 굴어 일의 양을 줄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첫새벽부터 밭고랑을 매니 입에선 단내가 났다. 친구들이 공을 차러 가는 시간에 삽을 드는 건 눈물이었다. 때로는 고추와 호박을 땄고, 때로는 과수원 농약 치는데 온종일을 보냈다. 왜 어른들이 '뼈 빠지게'라는 관용구를 입에 달고 사는지 절감했다. 고통스러운 노동은 해가 질 무렵, 진을 다 빼고서야 끝이 났다.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물고 경기결과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친구들을 만나는 건 굴욕이었다.

▶얼굴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건 그렇다 치고, 마음마저 타들어가는 건 소년에겐 트라우마였다. 금방 끝날 것 같은 시지푸스의 노동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이어졌다. 농활을 왔던 친구들은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으며 기타를 치며 놀았다. 왜 그 녀석들이 일을 돕지 않고 '베짱이'처럼 굴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아무튼 진땀으로 걸레가 된 내 모습을 보고 씨익 웃던 그 야릇한 미소가 잊히질 않는다. 물론 그 비열한 관조를 탓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창피했을 뿐이니까…. 당시 노동은 살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살아야할 목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훗날 커서, 노동의 트라우마가 왜 생겼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시키는 일만 했기 때문에 지겨웠던 것이다. 열심히 일만 하는 건 그냥 일만 하는 것이다. 시키는 일만 하면 나중에도 시키는 일만 하게 된다. 뇌는 그렇게 조작된다. 뙤약볕에 하루 종일 나가 고추를 따는 건 익숙함이다. 익숙해져 있으니 일할 마음이 없는 거다. 그때 만약 부모님의 근력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요량이 있었다면, 좀 더 힘을 썼을 텐데 하는 아쉬움마저 남는다. 그래서 익숙함이란 무섭다. 익숙해져 있으면 조금만 힘들어도 쓰러진다.(핑계를 대면서)

▶갈대가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움직이는 건 생존의 법칙이다. 그가 강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있다면 몸뚱이가 꺾여 금세 생을 마감할 것이다. 갈대의 노동은 그냥 흔들리는 것이다. 바람에도 흔들리고 빗방울에도 흔들리며 사념을 불태우는 것, 그게 그들에겐 노동이다. '개고생'은 누군가에게 눈도장을 받기 위해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안 해도 될 가욋일을 한다는 얘기다. 나무는 땅에 심어 놓으면 저절로 크지 않는다. 나무와 바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일 년에 0.5㎝씩 굵어지는 소나무의 깊은 앓이를 이해해야 한다. 노동의 대가는 소리 나지 않는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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