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땅이 부글부글 끓는다. 태양도 자신의 붉은 몸을 견디지 못해 구름 뒤로 몸을 숨긴다. 그 비등점은 사람들의 육체와 마음까지도 까맣게 태워버린다. 습기 머금은 바람 또한 지난겨울의 빙점을 잊어버렸다. 낮엔 폭염, 밤엔 열대야(夜), 태양의 저격을 잠시도 피해갈 틈이 없다. 몸에서 '화가 나는 건' 그냥 본능인데 맘에서 '화가 나는 건' 불능 아닌가.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하고 싶은 건 마음에 박힌 못 하나 때문이다. 버럭 성을 낼 수도, 그냥 꾹 참고 삭일 수도 없는 이 불편한 나날들, 이럴 땐 줄행랑이 상책이다. 숨어봤자 볕에 그을릴 테지만….

▶여름엔 겨울의 냉기를 그리워하고, 겨울엔 여름의 온기를 그리워한다. 그 그리웠던 겨울이 오면 다시 여름날의 폭염이 그리울 것이다. 이 바보 같은 악순환은 슬픈 예감이다. 여름과 겨울 사이, 겨울과 여름사이에 잠깐 머무는 ‘봄과 가을’은 꿈이자 슬픔이다. 사계절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득달같이 왔다가 쏜살같이 간다. 그래서 슬픈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다. 모든 꿈의 출발은 '지금, 여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슬플 때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일이다. 슬픈 일이 날아올 땐 온전히 슬퍼해야하고, 괴로운 일이 생기면 온전히 그 고통을 받아들여야한다. 그래서 '복기(復棋)'가 필요하다. 제대로 복기하지 않으면 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또다시 겨울을 기다리며 여름을 산다는 건 억울한 일이기 때문이다.

▶웃비가 한차례 좍좍 내리다가 그쳤다. 만성 피로증에 탈진한 영혼들은 그 습기에 잠시 몸을 내려놓고 ‘쓸모’를 찾는다. 스스로 '쓸모없어졌다'고 느끼면서 '쓸모가 생길 때까지’ 꿈을 좇는다. 노동자의 꿈은 는개처럼 청승맞다. 변호사들의 꿈은 변호사 일을 그만두는 것이고, 기자들의 꿈은 기자 일을 그만 두는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인들의 꿈은 바캉스(vacance)다. 이들은 한 달을 놀기 위해 1년을 일하고, 1년간 저축한 돈을 모조리 한 달 휴가비에 쏟아 붓는다. 일 년의 반을 휴가계획을 세우는데 보내고, 나머지 반은 휴가 동안의 뒷얘기를 하면서 보낼 정도다. 얼씨구나! 집토끼들이여, 집을 떠나자. 빳빳하게 풀 먹인 모시옷 입고, 죽부인을 껴안고 있어봤자 여름은 냉혹하게 사람을 벼를 뿐이다.

▶바리바리 싸들고 계곡을 향한다. 아무도 만지지 않은 숲속, 아무도 볼 수 없는 은둔의 땅으로 완벽하게 숨는 건 절지동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벌건 태양아래서 술판이 벌어진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에 탁족(濯足)하니 술에서, 몸에서 알코올기가 빠진다. 취하지도 않는다. 번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와 계곡 아래로 흐른다. 술잔은 금세 젖는다. 그리고 계곡은 이내 비틀거린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여름 위에 몸을 내려놓는 건 (하루짜리) 안식일의 호사다. 자연은 은자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여름날의 만취, 여름이 슬쩍 지나가며 비웃는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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