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 글, 임용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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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
甲子士禍(31)


왕은 이미 죽었거나 지금 자기의 신하 노릇을 하고 있는 자들 모두가 원수일 것이라는 상상으로 치가 떨리게 분한 마음과 함께 모골이 송연한 두려움까지 느꼈다.

20년이 훨씬 지나도록 생모 윤씨의 폐출(廢黜)과 사사(賜死)에 얽힌 사연을 아무도 귀띔해 준 자가 없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오직 야인인 임사홍 한 사람만이 밀고를 하였으니 왕이 모든 신하들을 원수로 착각할 만도 하였다. 믿고 의논할 사람, 힘이 되어 줄 사람은 임사홍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입직승지 들라 해라."

"예."

공사청의 기별을 받은 승지 신수영과 신용개가 부랴부랴 들어왔다.

간밤에 왕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폐비 당시의 시정기를 찾았다는 것을 어제 입직한 승지들로부터 전해들은 신수영과 신용개는 숨도 크게 못 쉬고 어전에 부복하였다.

왕은 그날의 입직승지에 신수영이 낀 것을 무척 반가와 하였다. 신수영은 왕비 신씨의 오라버니로써 연산이 명하는 일이면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임사홍에게 빨리 칙사를 보내 풍성군(豊城君)으로 봉군하고 즉시 입궐하도록 명하오."

"예."

신수영과 신용개는 영문도 모른 채 얼김떨김에 대답을 하고 황황히 물러갔다.

왕은 읽다 만 시정기를 다시 들추었다.

청송부원군 심회가 중전을 폐서인하되 사가(私家)로 폐출하지 말고 별전(別殿)에 거처를 국한하라 하였고, 도승지 홍귀달은 폐비 처분은 불가하다고 하면서 기어이 폐비를 하려던 왕비의 위호(位號)를 강등(降等)해서 별전에 거처케 하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나왔다.

성종은 중전을 폐하면 페하는 것이지 빈(嬪)으로 강등(降等)하는 것은 처를 첩으로 만드는 이치에 당치 않은 일이라고 홍귀달의 말을 일축하고 있었다.

홍귀달에 이어서 승지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개 폐비 처분을 반대하거나 사가로 내쫓는 것을 반대하고 있고, 성종이 노하여 승지들을 모두 가두라고 명하고 있었다.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한 승지들은 성종의 위엄에 눌리어 폐비 처분 반대 의사를 굽히고 있었다. 그리고 대사간 성현과 사간 이숙문, 홍문관 직제학 최경지, 전한 이우보 등의 순으로 폐비 처분의 불가함을 간하고 있었고, 성종은 정승들과 이미 논의하였다며 반론(反論)을 펴고 있는데 군신간의 입씨름이 언제 끝날지는 한이 없는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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