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자식을 위해 일하고 자식을 위해 온전하게 버틴다. 이런 일련의 무한희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숙명처럼 계승돼온 업보다. 자식 생각에 안 먹고, 못 입고, 안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니 이처럼 우매한 '불치병'도 없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한다. 자식들이 온전하게 크고 나면 신나게 먹고 입고 즐길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즐기려고 작심했을 땐 이미 폭삭 늙어버린 나이가 된다. 여행을 시켜줘도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그림의 떡이다. 맛있는 음식을 사줘도 치아가 좋지 못해 그림의 떡이요, 좋은 옷을 입혀도 가늘어진 뼈마디 때문에 이 또한 그림의 떡이다. 세월을 불태워 헌신한 대가는 이처럼 야박하고 비참하다. 이 온전치 못한 결말은 도대체 왜 대물림되는가.

▶자식으로 살다가 아버지가 되어보니 그 아버지의, 아버지처럼 살게 된다. '○○○, ○○○처럼 살지는 않겠다'며 하루에도 수없이 주문을 걸지만 '○○○처럼' 사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 안 먹고, 못 입고, 안 즐기는 피폐한 삶 말이다.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처럼 늙어간다. 물론 다 키워놓고 즐기려고 마음먹었을 땐 여행을 보내줘도 무릎관절이 안 좋아 포기할 것이고, 옷을 사줘도 헐렁할 것이다. 즐기고 싶으나, 즐길 수 없는 현실은 점점 더 행불행의 간극만 넓힌다. 살면서 쉬웠던 날은 없었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링'과 같은 곳이다. 먹고살기 위해 누구와도 한판 붙을 각오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격투기니까….

▶아이들이 커서 아버지, 어머니가 되면 행복해질까. 물론 희망적이진 않다. ①연애 ②결혼 ③출산을 포기해 '3포 세대', 여기에 ④인간관계 ⑤주택구입을 포기했다 하여 '5포 세대'라고 하더니 이제 ⑥희망 ⑦꿈을 포기한 '7포 세대'가 탄생했다. 이들이 포기한 슬픔의 총량은 부모들이 포기했던 눈물의 함량보다 깊고 크다. 연애와 결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좋은 인간관계와 좋은 집을 가지려 해도 돈이 필요하다. 돈이 없으면 희망과 꿈이 자동 폐기된다. 마치 주검으로 떨어지기 전 낙엽이 본연의 색(色·꿈)을 포기하는 것처럼….

▶2000년 동안 우린 단맛, 신맛, 짠맛, 쓴맛 등 네 가지 기본 맛만 느끼며 살았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 한 가지 맛이 추가됐다. 우마미(umami·감칠맛) 맛이다. 쓴맛은 본디 맛이 없지만 단맛과 조합하면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주고, MSG는 따로 먹을 때는 맛이 없지만 평범한 음식을 진미로 만든다. 이런 ‘맛’들은 단독으로는 ‘맛’을 내지 못한다. 어찌됐든 누군가와 섞여야 맛이 난다. 인생의 맛은 떫고 쓰다. 혼자서 버티기 힘든 인생이라면, 때로는 누군가의 조미료가 되어 감칠맛을 내어보는 것도 삶의 요령이다. 억수비 쏟아지는 여름날, 식구끼리 삥 둘러앉아 지짐이에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는 게 진정한 행복 아니던가.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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