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북적이던 집이 텅 비었다. 아내와 막내는 캠핑을 떠났고, 큰애는 동아리 MT에 갔다. 호젓하게 혼자 있고 싶었던지라 기꺼이 빈집에 남았다. TV와 선풍기, 노트북을 켜놓고 빈둥빈둥 돌아가는 세상의 시계는 껐다. 배고프면 주전부리를 하고, 노곤해지면 침대에 몸을 누였다. 무념무상, 분명히 호사였다. '불편'하지 않다는 것은 누군가의 '돌봄'이 없어도 괜찮다는 몸의 반응이다. 그런데 저녁에 날아온 한통의 문자와 사진(카톡)이 산통을 깨버렸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즐거워 보이는 캠핑장 풍경이었다. 갑자기 외로워졌다. 그 여인을 떠나보내고도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그 여인이 없는 세계가 오자, 무서운 공허감이 밀려들었다. 하얀 외로움이었다.

▶사향노루는 늘 혼자 다닌다. 교미를 위해 1년에 한 번 정도 암수가 만나는 것 외에는 혼자만의 생활을 즐긴다. 봄이 되면 사향노루는 몸의 일부였던 사향주머니를 발톱으로 스스로 떼어낸 후 떠난다. 철저하게 외로워지는 것이다. 대학시절 자취방 시절이 오버랩 된다. 당시 내 주변엔 '굶주린 청춘'들이 들끓었다. 그들은 내 찌개를 사랑했고, 내 이야기를 사랑했다. 공짜로 먹는 밥과 공짜로 듣는 얘기는 술만큼 취했으리라. 어떨 때에는 내가 자취방에 없는데도 화분 속에 숨겨놓은 열쇠를 찾아내서는 모든 음식을 섭식했다. 그렇게 2년여가 흐르자 갑자기 혼자 있고 싶어졌다. 철저하게 외로워지고 싶었다. 난 스스로 사향노루가 됐다.

▶그날 이후 혼자 먹고, 혼자 자고, 혼자 마시고, 혼자 걸었다. 외롭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허세였지만, 사실은 외롭다고 항복한 거였다. 고독이란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스스로 빗장을 치는 것이다. 외로웠고 또 외로웠다. 내 스스로를 달달 볶자 서서히 외로움의 끝이 보였다. 아니, 외로움의 끝이 아니라 외로움을 함께 나눌 무언가가 없다는 허탈한 분노였을 것이다. 그냥 우두망찰 앉아만 있어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항상 고독의 반대편에 서면 더 고독하다.

▶'미스터 초밥왕'은 단맛을 내기 위해 한참을 고민한다. 결국 그가 찾은 비법은 바로 소금이었다. 밥알에 소금을 뿌렸더니 오히려 단맛이 난 것이다. 세상의 이치도 같다. 단맛을 얻으려면 바로 정반대의 미각, 쓴맛을 알아야한다. 요즘 흔들린다. 자꾸 흔들린다. 주변에 널려있는 상황들이 목울대의 벌레처럼 불편하다. '세상의 쓰디쓴 맛을 알아야 인생의 달콤한 맛도 느낄 수 있다'는 보편타당한 명제가 몹시 불편하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불만'이다. 무엇인가 못마땅한 것이고 불편한 것이다. 외로움은 천천히 스며드는 게 아니라 별안간 저며 온다. 이럴 땐 누군가의 어깨에 살짝 기대고 싶어진다. 그리고 기꺼이 타인에게 어깨를 빌려주고도 싶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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