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전인준 음성여자중학교 교사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70이라는 숫자에 감격스러워 해야 하는 건지 통탄스러워 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여전한 독도 문제와 위안부 문제 그리고 또 최근엔 일본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둘러싼 강제 노동에 대한 그들의 억지와 발뺌 등이 암 덩어리처럼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70년은 나라를 되찾은 날로부터 지나온 기간인 동시에 시인, 윤동주를 잃은 세월이기도 하다. 우리는 광복 70주년과 함께 윤동주의 70주기를 맞이하였다.

윤동주는 1917년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용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던 중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던 중 광복을 6개월여 남긴 1945년 2월 16일 형무소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외롭고 비참하게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문익환 목사(윤동주의 친구)의 어머니 손으로 거두어졌고 연길 용정에 묻혔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에서 함께 지냈던 후배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자필 유작과 다른 시들을 모아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광복 이후 1948년 유고 시집으로 발간되었다.

그의 흔적으로는 그가 청춘을 보내며 공부했던 연세대학교와 일본 도시샤 대학에 그의 시 ‘서시’가 시비로 세워져 있고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북악 스카이웨이로 올라가는 길에 윤동주 문학관이 소박하게 건립돼 있다. 이 문학관은 수도 가압장이던 옛 건물과 폐기된 물탱크를 활용했다는 면에서 또 다른 의미 공간을 만들어냈다. 중국 조선족 문인 중심의 '용정 윤동주 연구회'는 지난 봄 윤동주 기념 사업을 추진해 민족정신을 이어가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윤동주의 삶은 꾸준히 연극으로 공연되고 있고 올해에는 소설로 형상화되기도 했다.

윤동주의 이야기를 좀 길게 한 것 같다. 사실 윤동주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올해만큼은 광복과 함께 그를 기억했으면 한다. 광복의 감격과 동시에 잃어버린 많은 것들에 뼈아프게 흘렸을 눈물을 기억했으면 한다. 축복할 일이 생길수록 그 축복을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운 법이다. 친근하게 동주를 부르고 그를 시작으로 우리가 상실한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름과 제자리를 찾아 주어야 할 것이다. 며칠 전 아이들과 '우먼 인 골드'라는 영화를 보았다. 클림트가 그린 숙모의 초상화를 되찾은 개인의 힘과 노력을 보며 우리도 찾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아니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영화관을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찾아온다는 것은 원래의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다는 것일 게다. 제자리와 제 이름을 잃은 것이 어디 문화재뿐이랴!

기념식도 좋고 다양한 문화 행사도 반갑고 감사한 일이다. 기억하고 기리며 뜻을 본받아야 하는 건 물론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실질적인 무엇인가가 이뤄져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광복70주년과 윤동주 70주기를 맞아 제자리를 찾는 무엇인가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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