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채밴드’ 리더 <충남 논산 출신> 정진채
중학교때 독학으로 기타 배우며 꿈키워, 실적 민감한 대중음악 성향 안맞아 포기
민중가요·블루스 밴드·CCM음악 활동, 10년간 광고업·밤업소 일하며 좌절키도
5년전부터 시인들의 작품 곡붙여 공연, 박범신 작가와 고향후배 인연 가까워져
나만의 노래로 공감·위로 줄수 있기를

▲ 싱어송라이터이자 진채밴드 리더인 정진채 씨는 “내 꿈은 처음도, 마지막도 음악을 하며 사는 것이다. 올해 시노래 음반과 진채밴드 3집 음반을 출시하려고 준비 중인데 마지막 정규음반이라는 생각으로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도 한때 딴따라였다. 무작정 드럼(drum)을 사서 미친 듯이 두드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먹고살아야 했기에 스틱을 집어던진 것이다. 그런데 가끔씩 꿈에서 드럼을 친다. 먹고살만해져서 그런 게 아니라, 잊었던 꿈이기에 다시 꿈꾸는 것이다.

최근 그 잃어버렸던, 아니 잊어버렸던 꿈의 뮤지션을 찾았다. 주인공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진채밴드'의 리더 정진채(46) 씨다. 박범신 작가의 장편소설 '주름' 자유낭독회가 있던 날이었다.

-언제 음악을 시작하게 됐나.

"중학교 2학년 때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다. 무엇엔가 홀린 듯 음악이 무작정 좋았다."

-고교 시절은 어땠나.

"남녀공학인 논산 연무고등학교를 다녔다. 운동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는 약간은 모범생이었던 것 같다.(웃음) 소풍 때 자작곡을 불러 인기를 끌었고 가끔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나름 학생뮤지션이었던 셈이다."

-어린 시절 얘기 좀 해 달라.

"탑정호가 내려다보이는 논산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5녀1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농촌의 주름진 삶이 그렇듯 푸성귀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학교에 갔다 오면 보리밥에 물을 말고, 된장에 고추 찍어먹는 걸 무척 좋아했다. 여름방학이면 탑정호 지류에서 하루 종일 수렵과 멱 감기를 했다. 대학에 진학해서야 대전에 처음 왔을 만큼 촌놈 중의 촌놈이었다."(웃음)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16세에 강제 징용됐다. 일본 삿포로에서 4년 간 고생했다고 들었다. 6·25전쟁에도 참전했다. 이후 평생 농부의 길을 걸어온 89세의 청년이시다.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대학에선 불어불문학(충남대)을 전공했다.

"불어를 배워본 적도 없고 동경한 것도 아닌데 왜 불문학을 택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딸이 불어과(대전외고 3학년)를 다니고 있다. 대학에 들어가서 지금의 아내를 운명처럼 만났다. 과(科) 커플이었다. 나처럼 에릭 클렙튼을 좋아했다. 음악적인 공감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룹사운드 '백마들'의 보컬리스트였다.

"대학하면 낭만 아닌가. 발길 닿는 대로 가보니 그곳에 ‘백마’들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낭만도, 음악도 없었다. 그때부터 나만의 창작음악을 하고 싶어졌다."

당시 그는 학과공부에 뜻이 없었다. 그래서 1학기를 마치고 도망치듯 군에 입대했다. 삶의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군악대가 아닌, 철원에서 포병생활을 했고, 그곳에서도 밴드를 만들었다. 부대회식에서 노래·연주를 해 인기가 꽤 좋았다고 한다.

-복학한 후 대학시절은 어땠나.

"창작음악을 하는 팀들을 찾아다녔다.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는 너무 상업적이어서 도전할 생각조차 없었다. 대중음악은 자본이 투하된 만큼 실적에 민감해 상업적일 수밖에 없고 뮤지션들도 맘대로 예술적 도전을 기하기가 어렵다. 어느 정도 개성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줄곧 인디밴드의 세계에서 창작음악만 고집했다. 솔직히 음악으로 폼 좀 잡았던 시기였다."

대중음악의 대안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1990년대 중반 잉태된 인디음악이 척박한 음악풍토에서 20년을 버텼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독립을 의미하는 인디는 자본에 찌든 주류 음악의 ‘빵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한다. 이름하여 '자작농'이다.

-민중가요밴드 '노래로 그리는 나라', 블루스 밴드 '유리'에서도 활동했더라.

"이전 음악의 주제가 '나'였다면 이 시기의 주제는 '음악의 사회성'이었다. ‘나’를 벗어나 ‘우리’로 영역이 확장됐고 ‘갇힌 세상’에서 ‘열린 세상’으로 광범위해졌다. 정말 즐겁게, 밴드답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는 1997년 결혼을 했다. 그리고 두 자녀를 낳았다. 이때 '아이빅밴드'를 결성했다. '아이빅'이라는 이름이 I believe in God의 준말인 것처럼 CCM(기독교음악) 음악을 하기위해 모인 밴드였다.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었나.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종교음악은 처음이었다. 내적으로 많이 성숙해지는 시기였다. 아이빅밴드 1집 '메시아'와 '아이빅 찬송가음반' 두 장의 앨범을 냈다. 지금도 아이빅밴드는 다른 멤버들이 명맥을 유지하며 계속 활동하고 있다."

-왜 돈 버는 직업을 버리고 음악으로 쭉 갔나.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었고 유일하게 좋아하는 일이었다. 중간에 한눈을 팔기도 했지만 한순간도 음악을 버리지는 못했다. 아니, 버릴 수가 없었다.”

-결혼 후 경제적인 문제는.

"광고업을 해보기도 하고 소위 '밤업소'일도 했다. 물론 먹고살기 위해, 싫어도 할 수밖에 없었다. 업소에서 하는 음악은 내가 생각하는 음악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 음악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고 싶었지만 취한 사람들을 위해서 노래하는 게 너무 슬펐다. 손님을 위해서 반주를 하고, 손님이 원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적으로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밤일 안하고 음악하면서 살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컸다. 스스로 포기하고 깎였다. 자그마치 10년을 그렇게 보냈다."

-음악에 대한 상실감이 컸겠다.

"그래도 현실 속에서 꿈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때문에 좀 더 희망적인 노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음악을 한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업소에서 일하냐고 물어온다. 그것이 음악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시선이다. 나의 꿈은 여전히 온전한 나의 음악을 하면서 사는 거다."

인디문화는 겉포장을 보지 않고 핵심을 보는 정신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근자의 인디문화 발흥은 주류문화를 향해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겉으로는 화려하지 않아도 콘텐츠가 뛰어나면 통한다는 생각이다.

-벌이는 어떻게 하나.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다. 레슨, 연주, 음향장비 대여, 로고송·CM·교가 작곡, 공연 등 닥치는 대로…. 드림뮤직(대표·대흥동)에서 모든 음악이 만들어지고 녹음된다. 평상시에는 기념음반 제작, 성우 더빙 등 녹음실 대여도 하고 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가장이 그렇듯 항상 가족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3집(예정) 타이틀 '정말 고마워요'라는 노래는 오로지 가족을 위해 만들었다. 그에게 1집이 20대의 고백이라면 2집은 30대, 3집은 40대의 자전적인 고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좀 더 깊어지고 가벼워지고 편해졌다.
▲ 정진채 씨는 시속에서 음악을 찾아내는 일에 매력을 느낀후로 작가·독자들을 위해 기타를 둘러맨다.

-진채밴드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있나.

"아이빅 녹음실을 시작하면서 만든 첫 음반(2001년) 모든 곡을 작곡하고 프로듀싱했다.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2001년 결성된 멤버들은 다들 소위 잘나가는 세션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드럼(조상훈), 베이스(최수항), 기타&보컬(정진채) 이렇게 3인조로 활동한다. 지금의 멤버는 어릴 적부터 인간적으로, 음악적으로 맺어진 선후배여서 얼굴만 봐도 이심전심이 통하는 사람들이다. 다들 가정이 있고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어 자칭 '생계형밴드'라고 부른다."(웃음)

그는 지난 6월부터 시노래(시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 음반 발매를 위한 크라우드펀딩(crowd funding:대중으로부터 자금을 모음)을 시작했다. 그는 4~5년 전부터 대전작가회의 회원을 중심으로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여 두 달에 한번 정도 꾸준히 공연을 해왔다.

-왜 시노래를 만들게 됐나.

"시와 음악이 만나 빚어내는 감성적이고 회화적인 느낌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노래를 만들면서 항상 힘들었던 부분이 작사였는데 그런 부분이 한방에 해결됐다. 또한 여러 시인들과 교류하면서 시속에서 음악을 찾아내는데 묘한 매력이 있더라. 행복한 작업이다."

-자면서도 곡을 쓴다는데, 몇 곡이나 되나

"대략 200여곡쯤 된다. 곡을 쓴다는 게 영적인 부분이 있어서 집중할 때는 무의식속에서 작곡이 될 때가 있다. 깨고 나면 생각이 안 나서 문제다."

인디밴드, 그 일을 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는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이기에 한다. 보통 그러한 것들을 사람들은 꿈이라고 부른다. '마이너리티'의 오래된 꿈이고, 가난하지만 진득하게 실현시켜 가고 있는 꿈이기도 하다.

-박범신 작가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소설을 통해서 흠모하던 중 선생님 집필관 오픈하우스 공연을 하게 되면서 인연이 됐다. 나의 고향집과 지척에 있고, 학연과 지연으로 더 공고해져 팬이자 고향 후배로 발전했다. 선생님의 소설 '소금'에 있는 시 '눈물'과 소설 '주름'의 '주름'을 곡으로 만들어 부르면서 더 가까워지게 된 것 같다. 최근 공연을 본 선생님이 가슴이 울컥했다고 고백하시더라."

-세월호 추모곡으로 유명하다.

"같은 나이의 딸을 둔 나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어서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다. 아침마다 뉴스를 보면 슬픔을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한해를 보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상은 슬픔과 분노의 끝으로 가고 있었다.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서 슬펐고, 돈이 없어서 슬펐다. 그런 슬픔과 분노가 노래로 만들어졌다. 세월호 추모곡 '팽목항에서'는 그렇게 잉태됐다."

-무명의 설움은 뭔가.

"일단 공연 페이가 너무 싸다.(웃음) 히트곡이 없어서 공연할 때 다른 가수의 음악을 많이 연주해야 하는 것도 나름의 설움이다."

-노래를 듣다보면 가수 안치환, 김광석 같은 느낌을 받는다. 친분 있는 가수가 있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뮤지션들이다. 안치환(직장암) 씨의 건강이 회복되길 빈다."

-앞으로의 꿈과 계획은.

"내 꿈은 처음도, 마지막도 음악을 하며 사는 것이다. 올해 시노래 음반과 진채밴드 3집 음반을 출시하려고 준비 중이다. 두 음반이 마지막 정규음반이라는 생각으로 작업하고 있다. 내 노래엔 사랑 얘기가 별로 없다. 내 얘기, 주변 얘기, 가족과 세상에 대한 노래가 대부분이다. 이제 듣는 이도 공감할 수 있는 위로가 되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

변방의 잡초처럼 그 꿈은 철저하게 가난하다. 언더그라운드의 아웃사이더처럼 그 꿈은 철저하게 슬프다. 주류(主流)를 거부하는 생계형 밴드. 무명으로 살아온 기나긴 여정을 끝내고 돈도 많이 벌고 인기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선술집에서 껄껄 웃으며 소주라도 한 잔 할 수 있지 않나. 인터뷰를 끝내고 헤어지는데, 그의 더벅머리가 빗소리에 놀라 꽃처럼 화들짝 흩날렸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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