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1995년, 출판사 '○○○○'에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A4지 두 장 분량이었는데 치기 어린 분노가 빼곡했다. 신경숙의 자전적 소설 '외딴 방'을 읽고 '뭐 이딴 식의 글을 책으로 냈느냐'고 따진 것이다. 왜 화가 잔뜩 났는지, 그 정확한 이유와 근거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글의 일정 대목에서 분명히 불편함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출판사 측은 답신하지 않았고, 내 저평가와는 달리 '외딴 방'은 문체미학의 정수라는 평단의 현란한 수사와 함께 이듬해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신경숙은 서울에서 고학하는 오빠들 뒷바라지를 위해 중학교만 마치고 상경해 여공(女工) 생활을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엔 야간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녔다. 그러면서 쉬는 시간이면 컨베이어벨트에 공책을 놓고 좋아하는 작품을 통째로 베껴 옮겼다. 그 시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문학수업이었다. 이후 그녀는 작가로서 모든 상을 휩쓸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와 한 자 한 자 노트에 옮겨 적어볼 때와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 소설 밑바닥으로 흐르고 있는 양감을 훨씬 더 세밀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부조리들, 그 절망감들, 그 미학들…."

(신경숙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筆寫로 보냈던 여름방학 中)

그녀는 필사(筆寫)를 통해 문체를 단련했다. 필사는 '베껴 쓴다'는 말이지만 표절은 분명 아니다. 단지 습작과정일 뿐이다. 누구나 문장을 연마하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외딴 방'을 읽고 분노했던 것은, 어쩌면 모든 사람들에게 상찬 받고 있는 그의 글을 질투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됐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미시마 유키오의 '우국' 中) ‘우국’을 베낀 혐의를 받고 있는 신경숙은 소설 '외딴방'의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을 똑같이 시작하고 끝맺는다.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비틀스는 '1000년을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인'으로 불린다. 이들이 아이돌(우상)로 추앙받는 것은 네 사람 모두 서민적이고 진실된 음악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트레이드마크였던 더벅머리와 다 떨어진 가죽재킷은 멋이 아니라 스트립쇼의 백밴드로 연명해야 했던 눈물을 대변한다.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곳이 없는 밑바닥 정서, 저급한 세상의 움직임을 베껴 쓰지 않고 날것으로 소화한 절대 미학인 것이다. 우리들에겐 때때로 아이돌(偶像)이 필요하고, 그것을 통해 다시 활력을 충전한다. 그래서 갑갑할 땐 외딴 방에 홀로 들어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넘어지고 있는지, 넘어뜨리고 있는지….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