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안경전의 9000년 한민족사 이야기⑩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한결같이 단군조선(=고조선)에서 한국사가 시작됩니다. 반면 ‘환단고기’는 환국을 첫 나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민족이 어떻게 그 역사를 이어왔느냐, 특히 어떤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정통성을 이어왔느냐 하는 것을 일컬어 국통맥(國統脈)이라고 합니다. 한민족의 국통맥을 말하기에 앞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민족이 참으로 조상들에게 고개를 들지 못할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그동안 한민족은, 한국인은 스스로 어떤 역사를 이어왔는지 잃어버렸습니다. 단군조선만 해도 그것을 단군신화다, 이렇게 치부하고 제대로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환단고기’를 통해 내 나라 역사, 내 민족의 국통맥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한민족의 역사는 환국에서 시작해 배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배달은 다시 단군조선으로 그 맥을 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어진 7000년 역사를 통틀어 삼성조(三聖祖) 시대라고 합니다. 교과서에 실린 단군조선 이전에 이미 5000년 역사가 더 있는 겁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식민사학자들이 이처럼 웅대한 한민족사의 뿌리를 몽땅 잘라내 버렸습니다. 더욱이 광복한 지 70년이 다 되도록 그 잘못된 내용이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마땅히 앞으로 한국사 교과서 내용도 바뀌어야 합니다. 환국과 배달을 계승한 단군조선은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경영했습니다. 이를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라 합니다. 만주지역의 진한, 한반도의 마한, 요서지역과 산동성의 번한이 그것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를 북삼한(北三韓)이라 하고 나중에 단군조선 몰락 후 한반도에 새로이 생겨난 신라, 백제, 가야를 남삼한(南三韓)이라 했습니다.”

-단군조선 다음에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나오고 그것이 고구려 등 삼국시대로 이어집니다. ‘환단고기’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앞서 지난 호에서 이야기했지만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식민사학의 날조와 왜곡으로 잘못 끼어들어간 역사입니다. 단군조선이 몰락한 뒤 국통을 계승한 것은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이 아니라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입니다.

해모수의 북부여를 필두로 북부여, 동부여, 남삼한 등 열국(列國)시대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북부여는 고주몽이 건국한 고구려로 나라의 맥이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사국(四國)시대가 열립니다. 그 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북쪽의 대진(발해)과 남쪽의 통일(후)신라가 남북국(南北國)시대가 됩니다. 그러면서 국통이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것처럼 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집니다. ‘환단고기’가 아니었으면 이 같은 한민족의 아홉 구비 면면한 국통맥을 바로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동안 단군조선에서 고구려 사이 우리 역사가 실종, 단절됐었는데 ‘환단고기’ 덕분에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 바로 북부여의 역사를 되찾게 됐습니다.”

-신라-고려-조선조의 1000년 시간에 걸쳐 쓰인 다섯 사서가 어떻게 ‘환단고기’라는 한 권 책으로 출간될 수 있었습니까.

“참으로 소중한 다섯 사서를 ‘환단고기’로 묶어 펴낸 인물은 앞서 잠깐 말했듯이 평안도 선천 출신의 운초 계연수(1864~1920) 선생입니다. 물론 ‘환단고기’가 탄생하기까지 많은 사람의 공덕이 있었지만 특히 계연수와 그의 스승 해학 이기(1848~1909)의 노력과 희생이 컸습니다. 계연수 선생은 역경 속에서도 전국을 돌며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민족 고유의 사서들을 찾아냈습니다. 이기 선생과 함께 그 가운데 다섯 책을 추려 환단고기란 이름으로 묶었습니다. 이렇게 편찬된 ‘환단고기’가 처음 출간된 것은 조선왕조가 일제에 병합된 1910년 이듬해입니다. 계연수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가인 홍범도, 오동진 장군이 호주머니 돈을 털어 초간본 30권을 발간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발간하고 나서 곧바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계연수 선생이 만주 관전현에서 후학을 길러내고 독립운동의 근거로 삼던 「배달의숙」이 일본 헌병대의 급습을 받은 것입니다. 독립군으로 위장한 일제의 밀정 감영극이란 자가 일본 헌병대에 배달의숙을 밀고했습니다. 일제 헌병대는 그곳에 보관돼 있던 역사책, 문서, 원고 등 온갖 자료와 사료 3천여 점을 불태웠습니다. 게다가 일제 헌병대는 계연수 선생을 잡아가 고문하고 나중에는 사지를 토막 내 살해해서 그 시신을 저 압록강에 버렸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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