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위원 칼럼] 손종학 충남대 법학대학원장

'전문가'의 사전적 정의는 '특정 분야에 관하여 풍부하고 깊이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영어로는 expert, specialist, master 등의 단어가 사용되며, 그 중 expert의 의미는 '일반인을 뛰어 넘는 특별한 지식이나 재능으로 정확하면서도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인정받는 사람'으로 풀이된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한 마디로 '특별한 재능을 가졌기에 그의 판단이 옳을 것이라고 인정받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보통 사람들이 도대체 가질 수 없는 이 '특별한 능력'을 보유한 자가 어떻게 그리 많을 수 있는 것인지, 너도 나도 전문가라고 표방하는 사회가 됐다. 여기도 전문가요, 저기도 전문가다. 가히 전문가 홍수시대이다. 왜일까? 전문가가 되는 순간 먹고 사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이요, 사회가 권위를 인정하여 그의 결정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난해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거나 전문지식을 공동체의 선을 위하여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고 왜곡한다고 느낄 때 그들에게 보냈던 신뢰를 소리 소문 없이 거둬들인다. 그리고 혼란에 빠진 구성원의 불신은 원망으로 쌓이고, 그곳에 전문가가 설 자리는 한 치의 땅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요즈음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메르스사태는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전문가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며 그들은 과연 어느 정도의 특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자들인지, 우리는 과연 그들을 신뢰하여도 무방한 것인지, 전문가로 대접받는 자들의 힘의 원천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며 위기시 그들이 공동체를 위하여 취하여야 할 책무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책무가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하고 있는 것이다.

메르스사태 초기에 시민들은 일말의 불안감 속에서도 방역전문가와 의료진을 신뢰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묵묵히 따라 행동하였던 것이다. 순전한 믿음으로 말이다. 왜 그랬을까? 말 그대로 그들은 특별한 지식과 재능을 가진 전문가이기에 그랬다. 아니 어쩌면 우리 스스로 특별인이 아닌 보통인이기에 달리 어찌 할 바를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 솔직한 답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신뢰의 행동이 허망에 빠진 어리석은 행동이었음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혼란과 공포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당연지국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전문가이기에 우리 사회는 보다 근본적인 불신을 던진다. 도대체 질병관리본부와 서울 대형병원의 전문가들이 보여준 행태는 그들이 과연 방역과 의료 분야의 '전문가'라고 지칭받기에, 그래서 우리가 그들의 결정을 믿고 따를 만한 충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나 한 것인지, 더 나아가 그 전문지식을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입장에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혹여 정의롭지 못한 생각으로 작은 이익과 소아(小我)에 치중하였던 것은 아닌지, 상식 차원에서 일어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리고는 곡학아세(曲學阿世)는 중국 한나라 시대의 고사성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언필칭 전문가라고 하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라고 결론에 이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불신의 늪은 넓고도 깊기에, 그리고 비단 의료계만으로 그칠 일도 아니기에 메르스사태가 종식된다고 하여 쉬이 거두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안의 심각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전문가들의 끊임없는 학문 연찬과 이의 올바른 적용이 오랜 세월 풍우(風雨)를 견뎌낸 채석강의 층암절벽처럼 겹겹이 쌓일 때 비로소 사회의 신뢰가 되살아나고 권위가 존중받게 됨을 가슴판에 새기고 이를 행동으로 옮겨는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불완전성을 전제한다면 지난한 과제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 참으로 무거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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