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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당 조성주 “하루 15시간씩 꼬박 10년 바쳐 세계 초유의 금강경 조각했죠”

서천출신 서예·전각가 국당 조성주
고교때 서울 상경후 10년간 회사생활, 어느날 직장근처 서예학원 무심코 등록, 구당 여원구 선생 만나 서예가의 길로
1997년 금강경 전각 ‘기네스북’ 등재, 서예 널리 알리고자 직접 음반내기도, 팔공사 동화사 세계초유 법화경 준비
내년 석가탄신일쯤 완성되면 공개

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 2015년 06월 02일 화요일 제11면     승인시간 : 2015년 06월 01일 20시 19분
기인(奇人)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을 만큼 사실 그는 기인이다. 서예가이자 전각가인 국당(菊堂) 조성주 선생은 1997년 5440자에 달하는 금강경 전체를 새긴 전각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며 한국기네스북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11년간 돌과 옥에 금강경을 새긴 뒤 20폭짜리 병풍으로 완성한 작품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여기에 국당은 3집까지 낸 가수이기도 하다. 그는 서예를 알리기 위해 기꺼이 ‘딴따라’도 마다하지 않는 예술계의 귀인(貴人)이다.



▲ 국당 조성주 선생의 예술은 불교 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특히 그의 전각은 돌에 쓰고, 그리고, 새기는 서(書)·화(畵)·인(印)·디자인·조각이라는 요소를 결합한 '음양각의 입체 각석 작품'이다. 조성주 선생 제공
-팔공산 동화사에 법화경을 조성 중인데.


"가로 25m, 세로 2.5m 벽화다. 법화경 8만~9만자와 탱화 21점이 음·양각으로 새겨지는 정밀 석각(전각)이다. 세계 초유의 작품이 될 것이다. 스스로 고안해낸 설치기법인 브릭아트(벽돌쌓기)로 접착제 없이 돌을 쌓는다. 돌의 크기는 사방 12㎝ 두께 3~6㎝입체로 쑥색 옥석을 쓴다. 4000편 정도로 무게만 5t이다. 워낙 어려운 작업이라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법을 접목했다. 이 또한 세계 기네스 등재 준비 중이다."

-언제쯤이면 완성본을 볼 수 있을까.

"2012년 말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4년째다. 70% 공정으로 내년 석가탄신일 쯤에 완성된다."

-브릭아트는 어떻게 고안해냈나.

"세계의 배꼽이라는 잉카문명과 불가사의한 경주 석굴암을 연구하다 착안했다."

-2012년 법화경 불광(佛光)전이 화제였다. 21세기형 팔만대장경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꼬박 6년을, 하루 15시간씩 쭈그려 앉아 법화경을 붓으로 쓰고,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돌판에 새겨 넣었다. 두주불사였던 술도 딱 끊었다. 재료비가 떨어져 낙심할 때마다 기적처럼 변통이 됐다. 승용차가 없어 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며 집과 작업실을 오갔다. 작업 중인 무거운 돌덩이를 배낭에 넣어 메고 다니기도 했다. 5t 무게의 석인재(石印材·중국산 요녕석 3000편 사용)에 법화경 전문 7만자를 새겼는데, 작품 전시공간만 70m에 달했다. 법화경(7권 28품) 가운데 관세음보살보문품은 수지독송(지니고 다니며 소리 내어 읽기)만 해도 소원이 이뤄진다는 뜻이 담겨 있어 불자들에게 널리 읽힌다."

-2000일의 고행이 만만치 않았겠다.

"전각 칼로 5t에 이르는 돌의 껍데기를 모두 벗기는 작업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돌에 한칼 한칼 새겨 넣었던 2000일은 한마디로 뼈를 깎는 수행의 시간이었다. 지문이 다 없어질 정도였다. 누군가는 고행(苦行)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이 작업이 나를 살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빚보증을 서는 바람에 수억원을 날리고 폐인 될 처지에 놓였을 때 불교무용가 전수향 선생이 법화경을 내밀었다. 읽을수록 마음이 평온해졌다. 책이 닳도록 읽었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은 외우다시피 했다. 그리고 전각 칼을 들었다."

-재료비는 어떻게 조달했나.

"돌을 구입하는 데 4억원이 들었다. 어머니가 첫 작업에 필요한 돌을 사라고 용돈을 모아 저축한 통장을 선뜻 내놓았다. 250만원이었다."

-제작기법이 독특하다.

"불교 미술의 새로운 방향이다. 전각은 흔히 방촌(方寸) 예술로 불린다. 사방 한 치(약 3㎝) 내외의 인면에 글과 그림을 새겨 넣기 때문이다. 난 사방 8㎝, 심지어 무게 50㎏에 이르는 20㎝ 크기의 돌도 사용한다. 거기에 쓰고, 그리고, 새기는 서(書)·화(畵)·인(印)·디자인·조각이라는 요소를 결합한 '음양각의 입체 각석 작품'인 셈이다. 스스로 창안한 퍼즐과 모자이크 방식도 대입했다. 이 같은 방식의 작품은 아직까지 세계에서 시도된 적이 없는 초유의 설치미술 작품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초월을 뜻하는 '하이퍼 전각'이다."

-금강경 5000글자를 전각(인장)으로 완각했다. 그 얘기 좀 들려 달라.

"1997년 사경(寫經)으로도 어렵다는 불교경전 금강경 5400여자를 1200여방(方)의 전각으로 완성해 한국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이는 서예계는 물론 불교계에서도 엄청난 화제였다. 서예가에게 금강경은 꼭 써보고 싶은 글감이지만 글자 수가 많아 쓰기 어렵다. 쓰기 전에 치밀한 설계가 필수다. 금강경을 쓰겠다고 해놓곤 붓을 내려놓은 서예인이 한둘이 아니다. 꼬박 10년을 바쳤다."

-3집앨범까지 낸 가수이기도 하다. 외도인가.


"뼈대는 서예이고 잎사귀가 노래다.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갈수록 잊혀가는 서예의 대중화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향인 서천의 신성리 갈대밭(3집 타이틀곡)을 알리기 위한 취지다. 음반에 수록된 곡들을 방송과 콘서트 등을 통해 들려주면서 서예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널리 알리는 것이다. 난 가수가 아니라 분명히 서예가, 전각가라고 말한다."

-서예와 음악의 공통점이 있을까.

"서예와 음악은 고저장단이 있고, 강약과 경중이 있으며, 완급이 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이다. 한 번 나온 소리는 되돌릴 수 없는 음악의 순간성처럼 서예 역시 일필휘지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방송 출연만 60여회에 달한다. 이는 전통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전통을 계승하되 서예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위해 각종 행사를 벌이겠다는 것이다."

-서예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대학 진학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종로 뒷골목의 가요·반주 학원 주변을 서성거리며 외롭게 방황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채로 20년을 지냈다. 어느 날 직장 근처에서 서예학원 간판을 보고 큰 기대없이 발을 들여놓았다. 퇴근 후에만 붓을 잡았는데도 일취월장했다."

국당은 충남 서천 천방산 골짜기에서 자란 삼대독자다. 초등학교를 다니며 서예를 처음 접한 국당은 서예대전에서 대상이나 우수상 한번 타지 못했다. 한번 응모에 수십명 받는 특선을 두 번 받았을 뿐이다. 고등학생이 돼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10년 정도 회사 생활을 했다. 30대 중반엔 서예학원을 차렸지만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 정도로 어려웠다. 1980년 서예계의 거목 여초 김응현 계보의 구당(丘堂) 여원구 선생을 만나 서예가의 길을 걷게 됐다.

-지난 2006년 이상봉 패션쇼에서 보여줬던 서예 퍼포먼스가 예술이다.

"ASEM 국제회의 오프닝, 장관 출판기념회, 유명 소설가 출판 기념회, 미국 힙합 그룹과의 앙상블 등 굵직굵직한 행사의 오프닝 행사를 도맡았다. 특히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이상봉 패션쇼는 이국 땅, 파란 눈의 사람들이 붓글씨의 멋과 우리 한글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갖게 해준 계기가 됐다. 서예필묵을 패션에 접목시킨 건 혁명이었다."

국당은 뒤늦게 37살에 대학에 입학해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내친김에 대학원에 들어가 동양예술학 박사 학위를 땄다. 그리고 서울대 등 10여개 대학에서 서예와 전각을 강의했다. 2006년에는 57세의 나이로 첫 음반 '궤적1'을 내고, 2008년에 2집 '궤적2'를 내놓았다.

-서예콘서트는 뭔가.

"컴퓨터 자판의 손놀림이 1차원적이라면 붓질은 3차원적이다. 요즘 청소년들의 단선적 사고도 1차원적 손놀림에서 연유한다. 요즘 그나마 위안이 됐던 대학의 서예학과가 속속 폐과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서예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널리 알리기 위해 누군가는 나서야한다. 고답적인 이미지를 벗고 대중 곁으로 나서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고향 서천은 자주 가는가.

"물론이다. 얼마 전에도 들러 군수와 지인들을 만났다. 현재 작품 보관창고를 짓고 있다. 내년엔 아예 생가 터(문산면 문장리 175)에 집도 짓고 주민등록도 옮길 예정이다. 50년 만의 귀향이다."

국당은 글씨와 전각으로 일가(一家)를 이뤘다. 유연하면서도 강렬한 필선, 경지에 오른 칼질. 무엇보다도 엄숙하기 짝이 없는 서예 동네서 전혀 기죽지 않고, 새로운 발상으로 현대미술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용단이 신선했다. 요즘 막걸리 맛에 깊게 빠졌다는 그는 바람 좋은 날 만나 한잔 하자고 했다. 흔쾌히 '콜'을 외쳤다. 가급적이면 서천 신성리 갈대밭에서 마셨으면 좋겠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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