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문화카페]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문화로 옮겨가면서 많은 삶의 요소들이 사라지거나 모습이 변화하고 있다. 직업이 소멸되고 나날이 새로운 업종이 나타나는가하면 오랜 세월 익숙했던 풍경과 습관이 느닷없이 생소해지는 급속한 문화접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존재하는 사물들은 디지털 시대에서도 종전의 기능을 계속 지키면서 오히려 더 번성하는 느낌을 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중 하나로 플래카드를 꼽아본다. 흔히 플랭카드로 잘못 부르는 현수막, 우리말로 펼침막은 지금도 펄럭인다. 과거 관주도 대국민 홍보나 계몽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던 플래카드는 디지털 의사소통 시대에 접어들어 다른 방편으로 대체되는가 싶었는데 여전히 도처에서 수많은 용도로 내걸린다.

대학에서는 대학본부, 각 학과의 행사광고나 취업자 명단이 내걸리고 중·고등학교에서는 높은 자리에 오른 자랑스러운 몇 회 출신 동문이름이 올라있다. 농어촌으로 가면 그 동네 출신 아무개 아들 아무개의 고시합격, 고위직 등용 소식이 큼지막하게 걸리고 지자체 지정 게시대에는 시청, 구청의 사업이나 주민 안내 홍보가 적혀있고 식당, 병원, 가발, 가구점, 모텔 등 업체의 갖가지 광고가 그 사이를 메운다. SNS로 연락하는 모임안내에 전화나 직접 전언 등 전통 방식을 추가하면 참석자가 약 30% 증가한다는 조사는 아날로그 소통의 효용이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별다른 홍보수단이 없었던 시절 길거리에 펄럭이던 현수막이 통신매체와 전파속도가 더없이 다양해지고 빨라진 이즈음에도 다양한 디자인과 실사출력기술에 힘입어 생명력을 유지한다지만 소박하고 촌스러웠던 그 시절 플래카드<사진>의 정취나 소구효과를 따라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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