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재필의 feel]
웃음으로 처방하는 대전 십자약국 정일영 약사
실습때 만난 선배의 웃음치료에 영향
현대인 대부분 마음의 병… 웃음이 특효
국내최초 약국관련 유머 책도 펴내
손님 이야기 듣다보면 유머소재 나와
단번에 끝내는 약 물으면 ‘파리약’ 대답
환자에게 약 건넬땐 부작용 설명해야

▲ 대전 산성동 십자약국의 정일영 약사는 위트 가득한 유머처방으로 동네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웃음이 만병통치약이라는 그는 오늘도 환한 웃음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하루에 15초만 웃으면 수명이 이틀 늘어나고, 통증 환자가 10분간 배를 쥐고 웃으면 최소 2시간은 고통 없이 잠들 수 있다고 한다. 웃으면 혈액 내 코티졸 분비가 줄어들고 엔도르핀이 늘어나 면역력이 증강된다는 것이다.

27년 동안 약국을 운영하며 환자들의 배꼽을 쥐락펴락한다는 괴짜 약사가 있다. 대전 산성동 십자약국의 정일영 약사(54)는 약을 조제하는 것 이외에도 위트 넘치는 유머처방으로 정평이 나있다.

-약국이름이 독특하다.

"내 이름이 정일영이다. 정10으로도 쓸 수 있다. 이걸 정일공으로 읽으면 안 된다. 일영은 10이니 숫자 10이 아닌가. 그래서 십자약국이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십자가도 상징한다. 더 신기한 일은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가 620102(육이영일영이)다. 주민등록번호에도 내 이름이 숨어있다."

-인지도가 있어서 약국이 제법 클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작다. 이 정도로는 수지타산 맞추기도 힘들 것 같은데.

"약국은 입지가 중요하다. 보다시피 주변 상권이 다 죽었다. 병원도 지근거리에 하나밖에 없어 돈벌이가 안 된다. 만약 돈벌이를 생각했다면 약국 일 접었을 것이다. 차라리 어떻게 하면 약을 많이 팔까 고민하지 않고 어떤 말로 손님들을 웃게 만들까 고민한다."

-몸이 불편해 보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거의 죽었다가 깨어났다고 하더라. 뇌수술을 했고 그 후유증으로 여기저기 불편하다."

-약사가 꿈이었나.

"70년대는 공과대학이 인기였다. 정부에서도 키웠고, 기업에서도 돈을 많이 줬다. 기계조립을 좋아해 공대를 가려고 했는데 교통사고 이후 생각이 달라졌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공대 갈 정도의 점수가 안 나왔다."(웃음)

-유머처방이란 게 독특하다.

"웃음은 어느 약보다도 효과가 좋은 만병통치약이다. 웃으면 더 빨리 치유될 수 있다. 웃음을 내적 조깅(internal jogging)이라고 부르는 것도 웃으면 순환기가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미소는 혈관청소부다. 약국을 찾아온 환자들이 유머 한마디에 아픈 걸 잊고 즐겁게 웃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유머 예찬론의 계기가 있나.

"약사 실습 때 만난 선배 약사에도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 선배는 아무리 아픈 표정을 짓고 오는 환자라도 웃음으로 이끌며 편안하게 해주는 색다른 비결이 있었다. 아픈 사람에게 약을 지어주고 웃음까지 덤으로 주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때부터 웃기기 시작했나.

"아니다. 막상 약국을 차리자 고민거리가 꽤 많았다. 내가 모르는 병을 물어보면 어쩌지? 내가 지은 약 때문에 부작용이 나지는 않을까 등등. 어떤 때는 약국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조차 두려웠다. 하지만 약국실습에서 배웠던 유머와 재미있는 대화를 활용하면서 초보약사라는 딱지를 뗄 수 있었다."

정 약사는 틈만 나면 환자들과 나눈 유머를 메모했다. 그리고 하이텔(인터넷통신서비스)의 약사 동호회 커뮤니티에 연재했다. 전국 약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를 눈여겨 본 출판사의 권유로 '재치와 유머로 배우는 실전 약국경영'이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약국관련 유머 책도 펴냈다.

-약사가 약만 잘 팔면 되지, 왜 웃음까지 팔아야하나.

"현대인의 병은 대부분 마음에서 온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웃으면 신체의 면역수치가 강화돼 약효가 높아진다. 당연히 병도 빨리 낫는다. 웃을 때는 들어오는 병이 없고 안 나가는 병도 없다. 환자들은 병 자체보다 병으로 인한 통증에 더 큰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런 환자들에게 약사의 말 한마디는 빛이다."

-웃기는 비법이 있나.

"딱히 없지만 굳이 대라면 경청과 능청이다. 손님의 말을 듣다보면 유머소재가 나온다. 가령 예전에 어떤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처방전을 내밀며 '죽을병 아니냐'고 묻더라. 그래서 '네, 죽을병이네요. 앞으로 70년 정도 사시다가 죽을병이네요'라고 말했더니 얼굴에 웃음기가 돌더라."

-약사도 아프면 병원에 가나.

"식당 주인이라고 밥을 안먹는가.(웃음) 아주 심하게 아프지 않으면 병원에 가지 않고 그냥 약만 먹는다."

-의약분업이후 의사와 약사가 갑·을로 바뀐 것 같다.

"사실 의약분업이후 약사의 프라이드가 많이 약화됐다. 진료는 의사가 맡고 약은 약사가 조제하는 게 의약분업의 기본 취지지만, 병원이 잘돼야 약국도 살기 때문에 이상한 먹이사슬이 됐다. 고객이 줄어 매출 또한 신통치 않다. 그래도 의약분업이후 남들처럼 휴일 때 쉬고, 휴가도 갈 수 있어 좋다."

-약물의 오남용을 막아보자는 의미도 있었다.

"(그런데) 실비보험이 문제다. 병원을 이용한 후에 병원비를 돌려받을 수 있으니 너도나도 보험에 중독돼 있다. 진료비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긴 하지만 사실 약물의 남용, 진료기관 이용이 남발한다. 진료비를 아까워하지 않으니 과잉진료, 과잉복용(남용)이 되는 것이다. 이런 비용들은 공짜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간다."

-우스갯소리에 모두들 박장대소하는가.

"모든 사람에게 농담을 하지는 않는다. 사람을 가린다. 대체로 연세 드신 분들은 농담을 잘 받아주지만 중년은 농담을 농담으로 받지 않고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오늘은 왜 싱거운 소리 안하느냐며 재촉하는 사람도 있다."

-웃겨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지치지 않나.

"그런 건 없다."

이때 약사의 아내가 약국 문을 열고 들어왔다. 슬며시 여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집에서도 부군이 웃기는가.

"(손사래를 치며) 집에서도 가끔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딸들은 그냥 쉰 소리라며 놀린다."

-딸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큰딸은 포항공대(포스텍)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받고 있다. 작은 딸은 성악전공인데 미국 대학원에 유학 중이다. 곧 결혼한다."

-조제약과 매약(처방전 없이도 살 수 있는 약)의 차이는.

"조제약은 맞춤복이고 매약은 기성복이라고 보면 된다. 요즘은 기성복이 맞춤복보다 더 비싸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조제약은 약효가 센 대신 부작용도 그만큼 세다."

-술 좋아하는 사람에게 우루사가 진짜 좋은가.

"영양제는 부채질이다. 밥을 먹지 않고 영양제만 먹으면 효과가 없다. 영양제는 보조역할을 할 뿐 그 자체가 밥은 아니기 때문이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일주일이면 낫고, 안 먹으면 7일이면 낫는다는 얘기가 있다. 감기가 나았다는 것은 감기의 원인바이러스를 다 없앴다는 것인데, 감기 바이러스를 없애는 약이 아직 없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로는 감기 치료약은 없다."

-약사 직업병은 없나.

"학교 다닐 당시엔 밥 좀 빨리 먹으라는 핀잔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약국을 하면서부터 밥 먹는 속도가 빨라져 밥 먹고 양치까지 끝내는데 채 5분이 안 걸린다. 의약분업이 된 이후엔 급하지 않은데도 속도는 여전히 빠르다. 식사를 즐길 수가 없다."

-폐의약품은 왜 수거해야하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쓰다 남아 못 쓰게 된 약을 아무 생각 없이 쓰레기통이나 하수구에 버린다. 버려진 약은 땅속에 스며들어 식물이 흡수한다. 그 식물을 동물이 먹고, 그 동물을 사람이 먹는다. 결국 사람이 버린 약은 사람이 도로 먹는 게 된다."

-무조건 불평하는 진상 손님도 있겠다.

"왜 이 약은 먹을 때만 효과가 있고 안 먹으면 또 아프냐며 따지기도 한다. 그러면 밥도 먹을 때만 배부르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럼 한 번에 끝장 보는 약은 없냐고 또 따진다. 난 단호하게 말한다. 파리약이라고. 하하."

-슈퍼마켓 주인 같은 느낌은 없나.

"자기의 병은 본인이 가장 잘 안다며 대뜸 ○○가 안 좋으니 ○○를 달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1000원 미만 약값을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사람, 5000원도 안 되는 금액을 연말정산용으로 프린트해달라는 사람, 1년에 한번 와서는 왜이리 일찍 문을 닫느냐고 항의하는 사람, 퇴근하려고 셔터 내리는데 급히 달려와서는 박카스 한 병 사가는 사람도 있다. 물론 손님들은 다 고맙다."(웃음)

-복약지도가 뭔가.

"환자에게 약을 건넬 때 약의 효능도 얘기해야 하지만 부작용도 함께 설명해야한다. 이건 의무다. 약사법에 나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약사들은 부작용은 얘기하지 않는다. 또 실제로 복약지도를 하면 무시한다. 미국의 경우 부작용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약사가 책임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부작용을 설명하면 부작용이 난다."

정일영 약사는 어려운 의학 '지식'을 알아듣기 쉽게 '상식'으로 바꿔주는 재능이 있었다. 그의 이름처럼 ‘나재필의 feel’도 10(일영)번째 인터뷰였다. 자신감 있는 사람이 웃는 게 아니라 웃는 사람이 자신감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일소일소(一笑一少)다.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진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에 앞서 눈물이 나올 때까지, 배가 아플 때까지 소리 내서 웃어 볼 일이다.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정일영 약사는

1962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 약대를 졸업(85년)한 뒤 2년 간 제약회사 품질관리부에서 근무했다. 87년 조치원에서 개국 약사의 길로 들어서 95년 대전에 십자약국을 열었다.

전국 복약지도 경연대회(2006년)에서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iN 상담약사(전문가 답변)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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