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아침편지④] 염홍철 배재대 석좌교수

프랑스어 중에 ‘클리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원래 인쇄에서 연판(鉛版)을 뜻하는 말이지만 ‘진부한 표현이나 고정관념’을 지칭합니다. 외국 사람들은 편지 끝에 ‘Sincerely Yours’라는 말을 꼭 붙이는데 굳이 번역한다면 ‘당신의 친구’ 또는 ‘마음으로부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외국인들까지도 이것을 ‘클리셰’라고 평가합니다.

글 쓰는 일을 즐기는 사람들도 클리셰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 전문적인 글쟁이가 아닌 탓에 반복해서 실수를 하지만, 예를 들어 “수정 같은 맑은 물이 소리 내어 흐르고…”라는 표현이나 “샛노란 개나리가 봄의 빛을 발하고…”라는 표현이 독자들이나 청중들께 감동을 줄 수 있을까요?

또 우리가 흔히 듣는 인사말 중에서 “공사다망한 가운데 자리를 빛내주신…”이라거나 “이 자리에 서게 되어 영광”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있는데, 과연 청중에게 어떤 설득력이 있을까요? “이 회사에 뼈를 묻겠습니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표현은 자칫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이라고 믿어주기보다는 오히려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연설 비서관이었던 강원국 메디치미디어 주간이 ‘대통령의 글쓰기’란 책을 펴냈습니다. 그는 ‘말과 글은 시작이 절반’이라고 전제하면서, 두 대통령의 연설의 ‘시작’을 비교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시작’을 좋아하지 않아서 의례적인 ‘시작’을 피하려고 했고, 그에 반해 김대중 대통령은 격식을 갖춘 출발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두 분은 모두 ‘천하의 명연설가’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너무 의례적이고 뻔 하게 느껴지는 표현은 듣는 이들에게 공감을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기교가 말의 효과를 높여 주겠지만 결국은 진정성이 있고, 솔직하고, 겸손해야 듣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정치인들의 경우에는 ‘단호한’ 표현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즐겨 쓰셨다는 ‘반드시’,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 ‘철저히’, ‘엄벌’,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확고히’ 등이 있습니다. 물론 의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효과가 있고, 특히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 강력한 리더십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기여했으나, 단정적인 표현은 결국 자신에게 덫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공직시절 이러한 표현을 자주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좀 무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말을 하여도 듣는 사람은 그 내용을 분간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실행이 따르지 않는 실속이 없는, 입에 발린 말은 진실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효과는커녕 부메랑으로 되돌아옵니다. 꼭 글쓰기나 말이 아니더라도 기관, 단체, 기업 그리고 수많은 영업장에서의 구호나 선전문구, 그리고 태도가 고객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신선해야 됩니다. 즉 클리셰를 깨야 하는 것이지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펴낸 ‘삼매경’에 의하면 일본의 어느 백화점에서 포도를 먹고 싶다는 딸아이의 청을 들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낱알로는 팔지 않아 상자로 사기에는 돈이 모자라서입니다. 이럴 경우, 통상 규정에 없는 일이라 판매가 어려운데, 한 직원이 규정을 어기고 포도알을 떼어 소녀에게 건넸습니다. 차가운 규정인 클리셰를 깬, ‘따뜻한 위반’이 큰 감동을 준 사례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 보다 더 어리석은 생각은 없다.”고 하여 클리셰 깨기를 암시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수요자 중심의 역지사지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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