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아침편지③]염홍철 배재대 석좌교수

9·11테러를 전후하여 일군의 무신론자들이 등장하여 종교비판을 쏟아냈습니다. 그들은 샘 해리스,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인데 이들은 하나같이 종교는 망상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대부분은 종교에 그 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전쟁, 종족학살, 테러리즘, 여성압제 등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 종교라고까지 비판합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선두에 섰던 존 로크를 시작으로 최근에도 테리 이글턴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무신론자들을 비판하면서, 신은 필요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했고, 과학은 세상의 법칙을 밝힐 수는 있지만 세상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반론 등을 제기합니다.

이런 논쟁이 이어지면서 과연 ‘종교가 필요한가?’ 또는 ‘종교와 종교인은 일반적으로 이타적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과학이 물질적 풍요를 가져올 것이며, 인간에게 마음의 행복을 줄 것 같은 기대를 모았지만 사실 기대대로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행하다는 심리가 예전보다 더 커졌습니다. 과학은 인간에게 방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것을 다 처리할 수 없고, 의료기술이 발달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은 높은 치료비 때문에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수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는 국가재정의 파탄으로 이어져 과학의 순기능만을 구가할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시 종교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종교적인 물음을 다시 한 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과학과 종교의 논쟁에서 큰 흐름을 잡아 준 사람은 2013년 ‘세계의 사상가’로 선정된 바 있는 조너선 하이트였습니다. 그는 세 번에 걸친 TED강의와, 그것을 더 확장한 ‘바른마음’이라는 저서를 통해, 무신론과 종교, 선과 악에 대한 균형 잡힌 분석을 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인류의 역사에서 거의 기적과도 같이 도덕적 진화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종교의 역할이 컸다고 인정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종교는 이기심을 억눌러주는 역할을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최소한 이기심을 활용하되 그것이 집단에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사회적 자본’을 이론화시킨 퍼트넘과 캠벨을 인용하면서 미국에서는 종교를 가진 집단이 종교성향이 약한 집단에 비해 자선기부, 자원봉사, 행실 면에서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에 독실한 미국인은 종교가 없는 미국인에 비해 이웃과 시민으로서 더 훌륭한 자질이 있다는 점도 인정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자선기부만 해도 종교성향이 약한 집단은 1.5%를 기부함에 비해 종교를 가진 집단은 7%의 기부를 실천했다는 통계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를 주도한 퍼트넘은 미국의 ‘사회적 자본’의 확충은 종교의 덕분이라는 결론까지 내리고 있습니다.

종교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독교, 불교, 유교를 막론하고 종교는 ‘죄 된 상태’, ‘미망의 상태’, ‘소인배의 상태’에서 ‘거듭나고’, ‘깨닫고’, ‘군자상태’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변화를 체험케 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제외하고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 또 하려고 하는 일은 매우 힘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고민하는 힘’을 쓴 강상중 교수는 무엇을 선택하려고 할 때마다 자아와 마주쳐야 하고, 그때마다 자기의 무지와 어리석음, 추함, 교활함, 연약함 등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매우 큰 부담이기 때문에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강상중 교수는 마음의 의지를 위해서도 종교가 필요하게 된다고 했고,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 도망쳐 ‘절대적인 것’에 속하고 싶다고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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