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 선생의 전통가요 이야기]
원로가수 김용만 히트 노래
1950~60년대 사회 반영
노래놓고 편갈라 싸우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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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떨어져 빽이 떨어져 애인마저 떨어져. 이것 참 야단났네. 큰 탈이 났네. 대포한잔 생각나네. 갈비한대 뜯고 싶네. 낙찰이야 빈털터리야 삼등인생이란다.'

이 노래는 1950년대에 발표됐으며 이 노래가 사회적으로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그러니까 어째서 인간이 등급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빽이란 단어가 왜 생겼단 말인가.

이 두 가지 단어가 이 사회에 미치는 파장은 아주 대단했다. 첫째는 어째서 인간이 일등급이 있으며 또 이삼등급이 있단 말인가. 사람은 다 똑같은데 말이다. 저마다 이 내용을 다르게 해석한다. 어떤 사람은 노래가사와 같이 돈이 없으니까 삼등인생이라고 해석을 하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은 못생기고 못났으니까 이삼등이겠지 하는가하면 저마다 생각대로의 해석을 하면서 답을 내놓는다.

이 사람의 답은 이러했다. 돈이 많고 양복을 입고 '네꾸다이(지금의 넥타이)'를 매고 가죽구두를 신은 사람을 일등인생이라고 하며 여자들은 뒷굽이 높은 가죽으로 된 '삐딱구두(지금의 하이힐)'를 말한다.

그리고 입술에는 립스틱을 빨갛게 바르고 머리는 파마(당시에는 까매머리라고 했음)를 한 사람을 일등인생이라고 나름대로 판단을 하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이등인생을 이렇게 판단을 했다. 당시에는 6·25전쟁을 치른 후여서 많은 사람들은 군복들을 염색하여 입고 다닐 때다.

당시에 군복들은 미국에서 들여온 지금으로 말한다면 순모직이었다. 그런 옷을 까맣게 염색해서 몸에 딱 맞게 줄이고 다림질해서 입으면 그 또한 맵시가 있었다. 이러한 사람을 이등인생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또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을 삼등인생이라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이렇게 삼등인생이란 노래를 가지고 편가르기를 하는가하면 심지어는 네가 옳다 내가 옳다고 하면서 싸움도 하는 사건도 벌어지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으니 이런 것을 뭐라고 표현을 해야 될지 이러한 일들은 지방으로 갈수록 심했다.

김용만의 회전의자 역시 화제의 노래였다. 이 노래는 60년대에 발표됐으며 이 역시 대단한 화제의 노래였다. 그러니까 절박함을 그리기도 한 노래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 시대를 꼬집었다고 해야 할지 사회적인 면을 꼬집은 노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당시는 자유당정권시대였다. 그때는 웬만하면 중죄인이라고해도 돈만 있으면 해결한다는 시대였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꿈은 회전의자에 앉아서 의자를 빙빙 돌리는 그 모습이 부럽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 노래가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가수 김용만은 만요를 구성지게 잘 불렀다 김용만은 1953년도 아리랑레코드회사에서 남원의 애수로 데뷔해서 당시 그 노래가 히트하자 1954년도 신신레코드회사에서 전속가수로 계약을 체결하고 효녀심청 삼등인생 청산유수 등을 취입했다.

이어서 57년도는 아세아레코회사로 전속을 하고 생일 없는 소년, 쾌지나칭칭나네, 잘 있거라 부산항, 항구의 영번지, 마도로스도돔바 등 숱한 노래를 히트시킨 가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1970년에는 MBC방송국에서 십대가수상을 수상했으며 2000년도에는 국무총리상도 수상했다.

<한국가요작가협회 작사·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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