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재필의 feel]
“가난해서 잡았던 가위, 서민들 시름 계속 잘라드려야죠”
하루 손님 200명에서 지금은 15명
한때는 공무원보다도 수입 몇곱절
학생들 미용실로 옮기면서 쇠락의 길
일부 업소 퇴폐영업도 직격탄 안겨
60년 가위인생 남은건 토박이 단골
원도심 그늘서 세월깎으며 사는게 낙

892705_289136_5347.jpg
▲ 대전시 동구 소제동 대창이용원의 이종완 이발사는 여든 가까운 나이지만 항상 웃는 얼굴로 원도심의 시름을 자르고 있다. 유명환 기자
이발소를 갈지, 미용실을 갈지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럴 땐 뾰족한 수가 없다. 동네업소를 두루두루 돌아다니다가 괜찮은 곳이 얻어걸리길 바라는 수밖에. 90년대 초까지 호황을 누리던 이발소는 낡은 달력 위 비키니모델처럼 빛이 바래가고 있다. 대전시 동구 소제동(솔랑시울길)의 대창이용원은 원도심 뒷골목에 잔뜩 웅크리고 있다. 내비게이션을 켜도 그냥 지나칠 만큼 도심 속 외딴섬이다. 동네는 70년대 풍경에 멈춰있다. 머리 깎는 사람도, 머리 깎을 사람도 그대로 멈춰있다. 이 부동(不動)의 풍경을 물경 반세기 넘게 지켜봐온 이종완 옹(79)은 원도심의 웃음과 눈물을 '가위손'에 절절히 기록하고 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청홍백색의 사인보드, 철사 줄이나 빨랫대에 걸린 빨간 체크무늬 수건,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 액자, 흰색타일로 마감한 세면대, 이발사 면허증과 태극기, 크고 작은 가위와 면도기가 꽂힌 헝겊주머니, 포마드 머릿기름…. 낡았지만 정겨운 옛 이발소 풍경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쉰다.



▲ 이종완 이발사(왼쪽)가 손님의 머리를 깎으면서 나재필 편집부국장의 취재에 즐겁게 응하고 있다.
이발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그는 최불암(탤런트) 얘기부터 꺼냈다. 얼마 전에 KBS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을 이곳에서 촬영하고 갔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내가 국밥과 돼지껍데기를 만들어줬더니 맛있게 먹더라는 얘기를 곁들이면서.

-손님이 제법 있다.

"하루에 10~15명 정도 깎는다. 면도까지 하면 7000원을 받으니 대략 10만원 벌이는 된다. 이 나이에, 이 정도 수입이면 용돈벌이가 넉넉하지 않은가.(웃음)"

-동네를 둘러보는데 좀 뒤숭숭한 편이다.

"10여 년 전부터 역세권 재개발한답시고 들쑤셔놓고는 여태까지 잠잠하다. (하긴) 저쪽 언덕배기는 불도저로 밀었더라. 아무래도 예전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할 것 같다. 다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철도관사가 남아있어 보존해야한다는 소리들도 한다. 하지만 주민들의 솔직한 심정은 빨리 개발이 돼서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질질 끄는 게 더 괴롭다.”

-어떻게 이발사가 됐나.

“열다섯 살 때 중학교를 중퇴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철공소에서도 일했다. 당시엔 기술을 배워야 살 수 있다고들 했다. 기술을 배우면 먹여주고 재워주니 그랬다. '시다(보조)'라도 하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 집에서 '입'하나 줄이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모를 거다."(참고삼아 얘기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도 미용사 출신이다)

-가정형편이 그렇게 어려웠나.

"9남매 중 넷째다. 무슨 돈이 있었겠나. 더구나 6·25전쟁 통에 입학금을 마련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선생들은 출석 부르듯 입학금 못낸 학생을 교탁 앞으로 불러냈다. 나 말고도 150명이 매일 망신을 당했다. 막판까지 안냈더니 교문을 잠그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길로 때려치웠다. 나의 중학교 생활은 딱 한 달로 종쳤다."

그의 고향은 조치원(현 세종시)이다. 광복되던 해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5학년 때 전쟁이 났다. 중학교 입학시험은 480명 중 48등을 했다.

-이발소 수습 생활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일단 머리감기는 일부터 시작했다. 세발(머리감기), 다음엔 함빠(면도), 주도(준직원)를 거쳐 시야기(드라이하는 직원)가 된다. 고무풍선에 비누칠을 해 면도연습을 하고, 제 다리에 있는 털을 깎으면서 기술을 익혔다. 함부로 손님의 머리를 만질 수도 없었다. (신안이발소) 그곳에는 기술자 세 명에 면도사 한명이 있었다. 2년 정도 허드렛일을 했고 이발 기술을 다 배우는 데는 5년 정도 걸렸다. 이발료가 80원이던 시절, 일당 200원을 받으며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대창이용원이라는 이름도 범상치 않다.

"1960년에 이발허가증을 받았다. 결혼하면서 이발소를 인수했고,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가 큰대(大)자에 창성할 창(昌)자를 써줬다. 아버지 뜻대로 꽤 오랜 시간 번창했다.(하하)"

-왜 소제동에 정착했나.

"이래봬도 소제동은 60년대까지 대전에서 세손가락 안에 드는 동네였다. 둔산동은 있지도 않았다. 제일 부촌(富村)이었던 대흥동, 선화동, 그 다음이 소제동이었다. 철도 관사가 있어서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철도기관사들이 단골이었겠다.

“당시엔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명의 기관사가 운행하지 않고 중간지점인 대전에서 교대를 했다. 그러다보니 서울, 부산, 대구, 광주를 오가는 기관사와 조수들이 이곳 철도 합숙소에서 하루씩 묵고 갔다.”

-철도청에서 일해보라고 권유도 받았다던데.

“단골이었던 철도청 인사국장이 제안했다. 하지만 이발소를 운영하는 게 공무원 월급보다 몇 배는 더 벌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렇게 호황이었나.

"80년대까지 돈 버는 재미가 쏠쏠했다. 조그마한 곳인데도 하루 150명 많게는 200명까지 손님이 들었다. 당시 직원만 다섯 명이었다.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었을 정도였으니…."

-최고의 고객은 누구였나.

“학생들이다. 철도 통학생들에게 ‘가위손’이라는 소문이 나자 천안, 조치원, 논산, 충북 옥천, 경북 김천에서도 왔다.”

-80년대 들어 이발소가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미용실 때문인가, 아니면 퇴폐업소라는 낙인 때문인가.(미용실은 1970년대만 해도 미장원(美粧院)으로 불렸다.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손질하거나 화장하는 일을 주로 했다. 이후 미용실로 바뀌면서 고객의 성별 구분이 없어졌다)

"둘 다 맞는 얘기인데, 거기엔 숨겨진 사연이 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기술 강국'을 외쳤다. 기술을 배워야 먹고 살 수 있다며 전사적으로 인력을 양성한 것이다. 그중 하나가 창녀(집창촌 여성)다. 창녀들에게 면도기술과 파마 기술을 가르쳤다."

-그런데 왜 퇴폐로 흘러갔나.

"여성들이 이발소에서 묘책을 냈다. 면도와 파마로는 돈벌이가 되지 않으니 업주들을 꼬드기기 시작한 거다. 유사 성행위나 매춘을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유혹한 것이다. 처음엔 업주들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있다가, 혹 하고 넘어가 퇴폐영업을 시작했다. 업소 당 3~4명의 아가씨가 있었는데 수입이 꽤 괜찮았다. 윤락으로 돈을 벌면 업주와 여자들이 반반씩 나눠가졌다. 면도, 파마보다 몇 배는 더 버는데 업주가 솔깃하지 않았겠는가."

-선생도 그렇게 했나.

"난, 그러지 않았다. 먹고살 만큼은 버는데 왜 그딴 걸 하나."

내가 웃자 그도 웃었다.

-퇴폐가 이발소의 몰락에 영향을 끼쳤다.

"물론이다. 퇴폐와는 거리가 먼 순수한 옛날식 이발관도 욕을 먹었다. 당장은 돈이 됐을지 몰라도 그것이 화근이 된 건 분명하다. (그러나) 퇴폐도 퇴폐지만 학생들이 떠나간 게 가장 큰 요인이다. 두발 자유화가 되면서 최대 고객이었던 학생들이 미용실로 발길을 옮겨버렸다. 학생 때부터 미용실에 길들여진 사람은 커서도 미용실을 간다."

-현재 대전지역에는 이발소가 몇 개나 남았나.

"60년대엔 대전에 1000군데가 넘었다. 지금은 500군데 정도…."(생각보다는 많았다)

-어떤 손님이 까다로운가.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요구하면 엉망이 돼버린다. 두상(頭狀)을 보면 어떻게 깎아야하는지 금방 파악된다. 머리모양, 머릿결, 머리숱을 고려해서 가위질을 하면 된다. 난 가급적 바리캉(이발기)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인터뷰 도중에도 단골의 백발을 정성스럽게 깎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축적된 시간들이 잘려나가는 듯 했다. 버려질 세월의 더께만큼, 가위가 닿자마자 백발이 버려졌다. 흰 가운이 정직한 흰색웃음과 섞여 빛났다. 마치 백의(白衣)의 의사 같았다. 사실, 중세 유럽 르네상스시대엔 이발사가 의사까지 겸했다. 오늘날 이발관을 표시하는 사인(sign)보드 간판이 빨강 파랑 하얀색 표시등(삼색원통:청색은 정맥, 홍색은 동맥, 백색은 붕대 또는 신경을 뜻함)으로 돼있는 것도 이발사가 외과 의사를 겸하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발사들은 칼을 다룰 수 있는 면허를 소지하고 있었고, 면도칼은 수염만 깎는 데 쓰인 것이 아니라 다리를 절단하는 데도 쓰였다.

그는 손님의 머리가 완성되자, 연탄난로 연통에 면도솔을 문질러 거품을 내더니 면도할 곳에 발랐다. 그리고는 가죽 띠에 날을 갈아 면도를 시작했다.

-스님도 제 머리 못 깎는다. 이발사의 머리는 누가 깎아주는가.

"앞머리는 내가 깎고 뒷머리는 아내가 간혹 깎는다. 아내의 경우 특별히 이발 기술을 배우진 않았지만 한창 바쁠 때 함께 있다 보니 웬만한 이발사보다 낫다. 물론 이발소 회원 간에 교류하며 서로 깎아주는 게 보통이다. 이발사가 이발사의 머리를 서로 깎아주는 식이다."

-이제 가위를 놓을 때도 되지 않았나.

"환갑 때까지만 이발소를 하고 그만두려고 했다. 근데 막상 그 나이가 되니까 너무 젊었다.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들도 그만두면 뭐할 거냐며 핀잔을 줬다. 그래서 집이 헐릴 때(재개발)까지만 하자고 생각했다. 근데 벌써 20년이 흘렀다. 이용기술은 손으로 하는 직업 중 정년이 없다. 건강만 하다면 소일거리로 삼을 생각이다."

인터뷰를 끝내며 나도 머리를 깎았다. 면도까지 하면 7000원, 머리만 깎으면 6000원이다. 만원을 냈더니 한사코 5000원만 받았다.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 60~70년대나 썼을 법한 세면대를 아직도 쓰고 있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