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나재필 편집부국장

세상을 투명하게, 청렴하게 만들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부정청탁·금품수수 금지법(김영란법)'이 국무회의 공포는커녕 곧바로 수술대 위에 오를 처지다. '잉크도 마르기 전'이 아니라 아예 '잉크도 못 찍을’ 판국인 것이다. 뭐가 그리 급했을까. 법안이 만들어진 지 2년 반 동안 방치하다가 며칠 새 허겁지겁 조문을 완성한 것은 아무리 봐도 졸속이다. 졸속이니까 누더기다. 이는 예상하지 못했던 사안이 아니다. 수정보완이 거론되는 부분은 △공직자를 넘어 민간 영역까지 확장한 적용 대상 △시민단체와 사회적 영향력이 큰 전문직 제외 △부정청탁 기준의 모호성 △수사권 남용 가능성 △배우자신고 의무화 △직무와 무관하게 금액 기준으로 청탁·뇌물 수수 여부를 판단하도록 한 조항 등이다. 김영란법은 공직자, 언론사 직원, 교직원 등에 대해 직무와 관련 없이 1회 100만원 또는 1년에 300만원을 넘는 금품수수, 요구, 약속을 금지하고 있다.

벌써 그 여파가 만만치 않다. 명절 때 선물 수요가 줄어들면서 내수시장이 위축될 거라는 걱정의 목소리가 나온다. 접대가 자주 있는 고급 음식점들과 호텔, 리조트, 골프장 그리고 식당, 술집도 김영란법의 영향권에 있다. 앞으로 1년 6개월 후에 시행한다지만 불황이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소비 심리는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식사 한 끼에도 누구나 수사 대상이라는 건 과잉금지다. 과거 접대비 실명제 때처럼 접대비를 쪼개서 처리하는 기업이 늘어날 것은 자명하다. 더구나 이제 배우자도 고발대상이 됐다. 앞으로 남편과 아내가 금품을 받은 걸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받는다. '연좌제 금지'라는 헌법정신과도 정면충돌한다. ‘나 몰래 돈 받았다고 부인을 신고하는 남편’이 어디 있을까.

형평성 떨어지는 것도 논란거리다. '제5부'라 불릴 만큼 공적 영역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시민단체가 적용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변호사회나 의사회, 방위산업체, 시중은행도 빠졌다. 가뜩이나 ‘식사 한 끼’에 눈을 부라리고 있는 시민단체에게 방울을 달아준 셈이다. 법 적용 대상이 300만명에 달하는 상황에서 고소·고발, 진정이 급증할 경우 정작 전문화, 조직화되는 대형 비리에 대처할 수사 여력을 빼앗길 수도 있다. 작은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다 큰 물고기를 놓치게 되는 건 아닐까.

‘영란 씨’의 말은 백번 옳다. 뇌물이 나쁘다는 걸 모르는 바보는 없다. ‘선물’은 나눔의 의미였다가 ‘뇌물’로 변했다. 베풂이 아니라 상납이 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윤리경영가이드북엔 뇌물과 선물에 대한 재미난 구분법이 있다. 받고 나서 밤에 잠이 잘 오면 선물이고 그렇지 않으면 뇌물이다. 일단 주고 나서 잊어버리면 선물이고 뭔가 돌아오기를 기대하면 뇌물이다. 또 언론에 보도됐을 때 문제가 될 것 같으면 뇌물이고, 자리를 옮기면 줄 것 같이 생각돼도 뇌물로 본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렇다고 공짜 싫어하는 사람도 없다. 금품이나 향응을 받으면서 아무런 대가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도 더더욱 없을 것이다. 법대로, 원칙대로 가다보면 때로는 겨울왕국처럼 모든 관계를 얼려버릴 수도 있다. 뜻밖의 ‘칼’이 들어와 자신을 기소할 수도 있다. ‘영란씨법’은 정의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정나미는 뚝뚝 떨어지긴 한다. 이제 식사자리에서 앞에 있는 사람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 의심하라. 그리고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라. 혹시 당신의 ‘공짜점심’을 녹음하고 있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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