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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4시부터 생로병사 현장 체크… 88세 총장오빠 소리들으며 뜁니다”

'소통하는 빵총장' 건양대 김희수 총장

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 2015년 02월 25일 수요일 제11면     승인시간 : 2015년 02월 24일 16시 38분

청년교육자 건양대학교 김희수 총장의 생생한 인생 스토리 동영상으로 확인하세요
새벽 4시, 바람도 잠든 시간에 어둠 뒤켠에서 어르신 한분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허름한 파카점퍼를 입었는데 걸음걸이는 청년이었다. 빵총장, 담배꽁초 총장, 총장오빠, 나비넥타이 총장, 작은 거인, 영원한 현역, 지역의 큰 어른으로 불리는 김희수(87) 건양대총장이다. 얼굴과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약간은 데면데면했다. 그와의 인터뷰를 위해 밤을 꼬박 새우고 만난 터라 더더욱 그랬다. 영하 4℃의 벼린 시간이 흐르는 병원 응급실 앞이었다.

그는 악수를 끝내자마자 당직상황실(원무)로 향했다. 그리고는 직원이 건네준 차트를 보며 '밤새 안녕한지'를 이것저것 물었다. 당직현황 체크가 끝나자 '생로병사'의 순시가 시작됐다. 김 총장은 매일 아침 11층부터 지하실까지 내려오며 병동의 명암(明暗)을 살핀다. 입원실, 간호스테이션, 식당(조리실), 화장실, 지하실 등등. 환자들의 치료 상태는 물론 화장실 청결상태까지 꼼꼼히 챙기는 것이다. 놀라운 건 간호사들의 이름은 물론 머리 색깔의 변화까지 꿰뚫고 있었다. 총장이 명랑하니 직원들도 (가식 없이) 명랑했다.

-매일 이렇게 일과를 시작하나.

"물론이다. 매일 새벽 3시30분에 일어나서 10분 정도 걸어 병원 응급실로 향한다.(집이 병원 근처다) 새벽에 일어나 걷는 습관은 이미 20년 정도 됐다. 이 병동 안에 생로병사가 모두 들어있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한 층에서 이뤄지기도 한다. 인생의 처음과 끝이 함께 존재한다는 건 거룩한 공간의 의미다. 물론 당직의사와 간호사들을 격려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대단히 고된 출발이다.

"병원을 살피고 나면 집에 가서 아침식사를 한다. 7시30분에 다시 병원으로 나와, 회의 주재나 결재 등을 마치고 10시에는 대학업무를 보러 간다. 이렇게 움직이면 오전에 7000보 이상 걷게 되고, 하루 1만 2000보는 거뜬히 걷게 된다. 이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후 6시에 퇴근해서 하루 동안 메모한 수첩을 정리하고 9시에 잠자리에 든다."

-(솔직히 말하면) 꼬장꼬장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

"(웃음) 병원을 세웠으면  내몸보다도 남의 몸에 대한 서비스를 하는 게 당연한 도리다."

-87세 전국 최고령 총장이다. 연세에 비해 무척 젊어 보인다.

"신체나이를 측정해보면 50대로 나온다. 내 치아도 모두 자연산이다. 술·담배도 안한다. 이따금씩 골프도 치는데 평소 워낙 많이 걷는 덕분에 18홀을 돌아도 다리가 전혀 아프지 않다. 눈도 1.2이고 청력도 말짱하다."

바다 집시 모겐족의 시력이 9.0이고 대초원의 몽골인이 4.0의 눈을 가졌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아흔에 가까운 사람이 청년의 눈을 가졌다는 건 '놀랠 노'였다.

-손주 같은 학생들이 총장오빠라고 부른다고 하더라. 너무 격의 없는 것도 예의가 아닌데.

"(웃음) 젊은 사람처럼 열심히 해달라는 응원으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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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새벽 김희수 총장(왼쪽)이 건양대학병원을 돌아보고 있다.
-어린 시절은 어땠나.

"한마디로 먹고 살만했다. 그 시절에 외양간과 돼지막이까지 있었으니 넉넉한 편 아닌가. 하지만 아버님은 사계절 내내 쉬지 않고 일을 찾아하셨다. 겨울에는 돗자리와 가마니를 짜고 축산과 고무신 장사도 했다. 어머님은 당시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동네 주민, 걸인들에게 자신의 밥을 내어주더라도 단 한 번도 그냥 보낸 적이 없는 분이었다. 이렇게 유복하게 자랐지만 내가 물려받은 재산은 논 1000여평이 전부다."

-어릴 적부터 의사가 꿈이었나.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큰형님이 독학으로 의사시험에 합격했다. 공주의 이인에서 지금으로 치면 보건소장직에 해당하는 공의(公醫)로 발령받았다. 형님은 한밤중이고 새벽이고를 가리지 않고 환자가 있으면 왕진 가방을 메고 나섰다. 말없이 실천하는 것 이상의 참교육은 없다고 하잖은가. 형님의 모습을 보면서 의사 꿈을 갖게 됐다."

-의대를 졸업하던 해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철도병원 인턴에 합격한 뒤 고향(논산)에서 잠시 머물 때였다. 아픈 상처가 있다는데.

"아버지가 우익인사로 지목돼 끌려갔다가 가까스로 살아 돌아와 다행이었지만, 서울에 있는 둘째형님 댁이 걱정이었다. (잠시 말끝을 흐리고는) 가슴을 졸이다가 9·28수복 때 서울에 급히 올라갔는데, 조카딸 하나만 남고 가족과 누님 한분이 한꺼번에 희생된 것을 알았다. 보름이상을 엉엉 울었는데 나중에 눈물이 말라서 나올 눈물이 없다는 소리를 실감했다."

-이후 1956년 미국유학길에 나선다.

"당시 나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당시 4살배기 딸을 둔 신혼부부였는데 가족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오르는 것 자체가 인생의 크나큰 도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50불 정도였다. 먼 장래를 위해 선진의학을 공부해야 된다는 생각이 앞섰고 한미재단에서 주선해주는 군함을 타고 15일의 항해 끝에 미국에 갔다."

-1962년에 '김안과' 문을 열었다.

"당시에는 의사가 개업하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개업이 안 되던 때였다. 정부가 개업 지역을 정해주던 시절이었다. 나는 '변방' 영등포를 택했다. 처음에는 환자가 없어서 동네를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붙였다. 적어도 10년 안에 대한민국 최고의 안과로 키우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참았다."

-파격적인 병원 운영이 화제였다.

"병원은 서비스업이다. 김안과의 성공은 환자를 왕으로 알고 고객만족의 병원 운영을 고민하고 실천한 결과다. 당시만 해도 의사들의 권위의식은 하늘을 찔렀고, 모든 병원은 6시에 문을 닫았다. 올 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는 식이었다. 난 여기서 힌트를 얻어 역발상을 했다. 365일 언제든지 찾아가도 문이 열려있는 병원, 환자에게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병원이 되자는 거였다."

-당연히 성공했겠다.

"환자제일주의인데 통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연중무휴 원칙을 세우고 명절, 공휴일은 물론 한밤중이나 새벽에라도 아픈 사람은 누구든 신속하게 진료 받도록 했다. 이때부터 환자들에게 신뢰가 쌓였다. 하루 외래환자가 수천명에 달해 역전 대합실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을 틈타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리기도 했다."

-그때도 혹사였다.

"초창기에는 점심을 거의 먹어보질 못했고 저녁도 마음 편히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밥 먹다가도 환자가 오면 수저를 내던지고 달려 나갔다. 그때 돈을 많이 벌었다. 카드라는 게 없을 때라서 무조건 현금 아니면 외상이었다. 매일 진료를 마치고 돈을 다 셀 수 없어서 은행직원이 와서 돈을 세어서 바로 가져가곤 했다."

당시 돈을 포대로 쓸어 담았다는 얘기가 회자될 정도이니 얼마나 환자가 많았는지를 갸름할 수 있다. 김안과는 현재 50여명의 전문의를 포함해 300여명의 대식구가 근무한다. 연간 외래환자만 40만명에 이르고 2008년에는 세계 최초로 망막전문병원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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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수 총장
-다른 얘기 좀 해보자. 김종필(JP) 전 총재와 학교를 같이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정치를 전혀 모른다. 하지만 한때 유혹을 많이 받았다. JP도 그렇고 내무부 장관을 지냈던 정석모로부터도 권유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치란 것은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잘한 선택이다."

-정치를 했다면 잘했을 텐데.

“당시 논산에서 총선 출마를 했다면 당선됐을 지도 모른다. 논산에 중·고교, 대학교를 갖고 있고 종친회도 있었으니 말이다.(웃음)”

김 총장은 JP의 공주중학교 1년 후배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서도 슬쩍 이완구 총리에 대해서 묻기도 하고 촌평(寸評)도 곁들였다.

-육영사업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1979년 고향인 논산 양촌면의 한 중학교가 폐교 지경에 이르자 지역 유지들이 학교운영을 부탁해왔다. (생각할 것도 없이) 부채와 함께 인수해 새로 건물을 짓고 운동장을 만들었다. 83년에는 고등학교도 설립했다. 나는 평소 '꿈 너머 꿈'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의사로서 성공한 이후의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줄곧 고민해왔었다. 그러다가 요즘 말로 필(Feel)이 꽂힌 거다.”

-남들 은퇴하는 나이에 대학을 세웠다.

“중고등학교를 운영하던 1986년, 주변의 지인들이 논산에 대학 설립을 권유했다. 그런데 당시 대학가는 학생운동이 매우 거셌던 시기로 정상적인 수업이 힘들었다. 또 서울도 아닌 지방에 대학을 설립하는 것 자체가 무모하다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논산에 대학을 설립한 이유는 고향에 제대로 된 대학을 설립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역과 기업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육성하고, 지역민들도 언제든 와서 배울 수 있는 평생교육기관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방대학의 롤모델로 성장했다.

“후발대학으로서, 지방에 위치한 대학으로서 기존 대학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건양대는 '최고'보다는 '유일'한 대학이 되고자 했다. 실용적 교육프로그램과 차별화된 학사제도 도입을 통해 혁신을 주도했다.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있는 사립대학이 짧은 시간에 이뤄낸 이러한 성과는 스스로 되돌아보아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 깐깐하다는 평도 있잖은가.

“가르쳤으면 책임진다는 자세가 뭐가 문제인가. 대학은 가르치면 땡이라는 생각을 버려야한다. 가르쳤으면 취업까지 시키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교육부나 다른 학교 관계자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인가.

“전국 대학들이 벤치마킹하려고 많이 방문한다. 전국 최초로 융합 전문 단과대학인 '창의융합대학'을 신설했는데 4주를 1학기(연 10학기제)로 운영하는 집중교육 시스템이다. 기존 학사제도의 틀을 완전히 깬 것이다. 또 국내 최초이자 유일하게 의대와 공대를 결합한 의료공대를 설립했다.”

-동기유발학기도 역발상이다.

“입시에 쫓기는 우리나라 수험생들은 학과선택 시 구체적인 정보 없이 막연한 희망과 취업가능성을 보고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대학에 들어와서 학과에 적응을 못한다든가 수동적으로 학업에 임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신입생 때부터 뚜렷한 진로목표를 설정하고, 향후 4년간의 강력한 학습동기를 유도해내기 위해 과감히 4주간의 독립된 학기로 동기유발학기를 시행했다. 그 결과 지방대에 왔다고 자신 없던 학생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향후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는 등 자기 주도적 학습이 가능하게 됐다.”

-'빵총장' 별칭은 왜 생겼나.

“대학 다니는 동안 총장 이름조차 잘 모르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험기간 밤늦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기특해 빵과 우유를 사서 주기 시작한 게 일종의 전통이 되면서 붙은 이름이다. 학생들을 만날 때 격식을 차리지 않으려 한다. 가끔은 통학버스에 올라타고 옆자리에 앉은 학생과 타고 가는 내내 이야기 한다. 학교 근처 하숙집 주인들을 만나 학생들에게 애정을 갖고 신경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학교 주변 상가주인들과 식사를 하면서 술을 너무 많이 팔지 말라든가, 밥값을 비싸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한다.”

김 총장의 트레이드마크는 '나비넥타이'다. 미래희망재단의 스티브 김이 선물한 나비넥타이가 마음에 들어 이후 착용하게 됐다. 그래서일까. 1초마다 20번 이상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그는 1초조차도 아끼면서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담배꽁초 총장 별명도 있다.

“새벽부터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담배꽁초나 휴지를 줍다보니 학생들도 자발적으로 함께 한다. 그래서 붙었다.”

-건양대 졸업식은 3일간 진행된다.

“맞다. 그 이유는 내가 직접 모든 졸업생 한명 한명에게 직접 학위증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졸업식의 경우 친구들과 사진만 찍고 학위증은 잘 찾아가지도 않는 세태가 생겨났다. 이건 아니지 않는가. 또 사랑과 희생으로 자녀를 뒷바라지해온 학부모를 선정해 신사임당 상을 주기도 한다. 이 덕분에 졸업식 참석률은 80%가 넘는다. 대단한 변화다.”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점수는.

“꼼꼼한 일처리 탓에 재미없을 거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고 병원과 학교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내조해준 아내에게 고맙다.”

김 총장은 한국전쟁 직후 초대 대전보건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의대 동기 여동생과 결혼했다. 

-인생의 지표로 삼아온 게 있다면.

“기본에 충실하자다. 사람의 기본은 정직, 성공의 기본은 노력, 병원의 기본은 치료, 학교의 기본은 교육이다. 기본이 지켜지면 모든 게 만사형통한다.” 

인생에 정년은 없다고 몸으로 말하는 총장. 그의 환한 웃음에서 '100살 총장'이 읽혔다. 내 나이가 미안해지는 새벽이었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김희수 총장은
충남 논산 출신으로 공주고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대학원을 거쳐 연세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 김안과병원을 개원했으며 현재 동양 최대의 안과전문병원으로 성장시켰다. 80년과 83년 건양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설립하며 육영사업에 뛰어들었으며 1991년 건양대학교를 설립해 1994년 건양대 의과대학을 유치, 2000년에는 건양대학교병원을 개원했다. 2001년부터는 대학의 총장으로 직접 건양대를 이끌며 6년 연속 보건의료 국가시험에서 전국수석 배출, 교육역량강화사업,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ACE), 산학협력 선도대학 육성사업(LINC) 등 교육부 3대 사업에 모두 선정되는 등 대학의 눈부신 성장을 이끌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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