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벌써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1968년 그 춥고 바람 차갑던 12월, 어떤 시인이 대전교도소에서 '동백림사건'으로 복역 중인 이응노 화백의 면회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때 나는 검찰과 법원, 교도소를 담당하는 법조출입 기자였다. 교도소장의 배려로 우리의 면회는 소장실에서 이루어졌다. 잠시 후 이응노 화백이 교도관의 호송을 받으며 소장실로 들어섰는데 가슴에 수인번호가 찍혀있는 두툼한 솜바지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이응노 화백이 죄인이라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목소리도 맑고 나지막했으며 뒤로 깨끗이 빗어 넘긴 흰머리는 유럽 미술계의 거인으로 우뚝 선 그의 카리스마를 여전히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의 화제는 그의 헤어스타일부터 시작했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고 대전교도소로 이감됐기 때문에 그 당시 규칙으로는 머리를 스님처럼 빡빡 깎아야 했다. 그런데 그의 머리는 그대로 있었다.

이응노 화백은 옆에 앉아 있던 교도소장에게 "내 머리(首)는 짤라도 되지만 이 머리(髮)만은 안 짜르게 해달라"고 농담 속에 진심을 비쳤다. 그러면서 그는 교도소의 특수한 환경에서 예술혼을 응집시키는 어떤 암시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응노 화백은 세계 미술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밥풀'조각을 이곳 대전교도소에서 만들었다. 재소자에게 식사 때 나오는 밥을 아껴 그것을 모았다가 진흙처럼 반죽을 하고 물감이 없기 때문에 반찬으로 나오는 된장과 간장을 밥풀에 부어 색상을 나타낸 것. 그러니까 그때 죄수복을 입고도 미소를 머금고 무엇인가 암시하던 것이 이 작품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탄생된 것이 '얼굴'이라는 이름의 32×16×125㎝의 밥풀소조다. 그 작품을 한참 응시하노라면 그 '얼굴'들과 몸짓에서 그 어떤 것에도 포기할 수 없는 영혼의 불길, 간절한 인간의 자유, 그 희망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것 말고도 대전교도소 수감 중 300여점의 옥중화 그림을 그렸고 이 소중한 작품들은 고암 이응노의 실험정신이 잘 나타난 것으로 찬사를 받았는데 최근 미국 시카고미술관에서 전시에 관심을 보여 다른 그의 작품과 함께 이 '밥풀'의 메시지도 미국대륙에까지 전파될 희망을 갖게 됐다.

이지호 이응노미술관장은 이 전시가 성사되면 유럽 중심으로 잘 알려진 이응노의 작품세계를 북미대륙에까지 더욱 알려질 것이라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잖아도 프랑스에 있던 1300점의 이응노 작품을 새로 기증받는 등 기대이상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이응노미술관이 대전의 문화적 자산이며 경쟁력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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