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규 서예이야기]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 학문이 뛰어난 장해(張楷)라는 선비가 있었다. 순제가 그의 능력을 알고 있는 터라 여러 번 등용하려 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 삼아 황제의 청을 거절하곤 했다. 권력 싸움에 정신나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조정에서 그들과 같이 있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장해는 춘추(春秋) 고문상서(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서 평소 거느리고 있는 문하생만 해도 100명을 웃돌았다. 게다가 전국 각처의 숙유(夙儒)들을 비롯해 귀족과 고관대작들까지 다투어 그를 가까이 하기 위해 그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는 이를 싫어해 화음산(華陰山) 기슭에 자리한 고향으로 낙향했다.

그러자 장해를 쫓아온 문하생과 학자들로 인해 그의 집은 저잣거리를 이루다시피 붐볐다. 나중에는 화음산 남쪽 기슭에 장해의 자(字)를 딴 공초(公超)라는 저잣거리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장해는 학문뿐 아니라 도술(道術)에도 능해 쉽사리 ‘오리무’(五里霧)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장해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귀찮아서 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방술(方術)로써 사방 5리에 안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사물의 존재나 사건의 해결을 위해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해 오리무중(五里霧中)할 때가 많다.

지금도 학문이나 정치에 빼어난 사람들이 나라의 일에 항시 바르게 앞장설 때 우리나라가 세계화 속에서 더욱 돋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된다. 학교의 융합교육과 사회의 창조경제가 이루어져 우리나라 3년 경제혁신 마지막 실천으로 개인소득 4만달러 시대가 꼭 이루어지도록 각자의 업무에서 노력할 때 경제 대국의 면모가 또 이루질 것이다.

<국전서예초대작가·前대전둔산초 교장 청곡 박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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