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재필 편집부장

땅콩 한 봉지가 사람을 잡았다. '땅콩 회항'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 파문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녀는 견과류를 접시에 담지 않고 봉지 째 주자 발끈했다. 분을 못 견딘 그녀는 승무원 무릎을 꿇리고 질책하면서 책을 던졌다. 그리곤 "너, 내려"라고 명령했다. 급기야 이륙을 위해 활주로로 가던 여객기는 탑승구로 리턴했다. 물론 쫓겨난 사무장은 12시간동안 공항 미아신세였다.

지난해엔 라면 한 봉지가 사람을 잡았다. 대기업 상무가 기내에서 "라면이 짜다. 제대로 익지 않았다"며 들고 있던 잡지로 승무원의 얼굴을 때린 것이다. 당시 조현아는 사내게시판을 통해 명문(名文)을 남겼다. "승무원이 겪었을 당혹감과 수치심이 얼마나 컸을지 안타깝다. 승무원의 업무를 방해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법률 조항도 이 기회를 통해 마련될 것이다. 앞으로 항공기의 안전이나 운항을 저해하는 행위가 발생해도 규정과 절차에 따라 일관된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정당하게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나 1년 8개월 만에 '라면'은 '땅콩'으로 변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국민들이 화나는 건 '슈퍼 갑(甲)' 횡포다. 직원을 종 부리듯 다룬 점, 오너3세의 안하무인적 행동, 많은 승객이 탑승한 여객기를 자가용인양 부린 점, 오너 지시에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여객기를 돌린 기장, 항공운항 규정을 무시한 처사 등에 분노하는 것이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유사한 사건은 이뿐만이 아니다. 모 의류회사 회장은 항공기 출발 1분 전에 나타나 게이트를 열어주지 않는다며 항공사 직원을 신문지로 때려 '신문지 회장'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장 친밀한 후원자인 박연차는 술 취한 상태로 항공기에 타서는 '이륙준비를 위해 좌석 등받이를 세워 달라'는 승무원의 요구를 1시간가량 거부하다가 재판에 회부됐다. 당시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검찰의 구형량(벌금 1000만원) 보다 높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런가하면 어떤 대기업 회장(재벌 2세)은 무엇엔가 기분이 상했는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임원을 고속도로에 내려놓고 가버린 적도 있다. 부모 잘 만나서 '금 수저 물고 태어난' 이들이 비행기 일등석뿐만 아니라 '권력 일등석'에도 오르려는 행위는 갑질 중 '일등감'이다.

스웨덴의 대표적 기업 발렌베리 그룹을 반면교사로 삼아라. 이 기업은 150년 넘게 5대째 세습경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스웨덴 사람들은 발렌베리 일가를 존경한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여가 크고 '존재하지만 보이지 말라'는 가훈을 철저히 지키는 몸가짐 덕분이다.

강남에서 자란 어떤 젊은 놈은 아버지뻘인 경비원을 폭행했다가 '패륜'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경비원도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다. 너저분한 휴지를 허리 숙여 치우고, 더럽혀진 레버를 땀 흘리며 닦는 청소부 아주머니는 누군가에겐 세상에 하나뿐인 '어머니'이고 아내다. 어쩌면 퇴직 후의 우리 모습일 수도 있다.

갑질하는 이들의 보편적 언어는 '너, 내가 누군지 아느냐'는 거다. 그래 안다. 알아. 돈은 많지만 골빈 놈(년)이라는 사실을. 사람을 만들어야 그 아래에서 사람이 나온다. 사람이 아니면 사람을 낳지 못한다. 큰 바다는 아무리 더러운 구정물이 들어와도 끄떡없지만 작은 구덩이 물은 흙탕물이 조금만 들어와도 더럽혀지는 법이다. 진정한 리더(leader)는 리더(Reader)여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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