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가이드]
1971년 벽돌무덤 ‘무령왕릉’ 발굴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묘 확인
2906점 부장품 중 12점 국보지정

▲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는 무령왕릉을 비롯해 7개의 능이 있고(왼쪽)무령왕릉의 입구는 봉해져 있다.

지난 1일, 전날 내린 비로 땅이 촉촉이 젖어든 이날 충남 공주를 찾았다. 대전에서 자동차로 약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이곳은 가을을 흠뻑 머금고 있었다. 단풍이라는 결실로 가득한 산야와 곳곳에서 풍기는 가을 내음은 지친 마음을 한결 편안케 했다. 하지만 공주는 이렇게 한없이 자연의 정취에만 취하기에는 볼거리가 너무 많은 도시다.

공주는 찬란한 백제의 역사를 품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약 1500여년 전 백제의 도읍지였던 곳으로 아직까지 백제의 숨결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백제의 비밀을 밝혀낸 숨은 무덤, 무령왕릉과 그리고 그 동쪽으로 백제시대 도읍지인 공주를 방어하기 위해 축성된 공산성이 있다. 

역사의 정중앙. 발길 닿는 곳마다 잔잔히 물결치는 역사의 흔적에 작은 감동을 느낀다. 또 공주는 삼국시대 화려했던 백제의 문화적 풍성함을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최근 개관한 아트센터 고마에서 진행되고 있는 특별전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크다. 그럼 이제 역사와 문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이 도시에 대해 천천히 알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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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비밀 밝혀낸 숨은 무덤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공주를 백제 역사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한 핵심이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발굴됐는데 당시 이는 한국 고고학계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무령왕릉을 발견한 것은 당시 백제시대 왕과 귀족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송산리 무덤군에서 배수로 작업을 하던 인부들로, 이들은 땅을 파다가 벽돌무덤을 발견했다. 

고고학자들이 급히 발굴을 시작하고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던 돌들을 치우자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났다. 그 안에 돌판 두 장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의 판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사마는 백제 25대 무령왕의 본명으로 이 무덤이 무령왕릉임을 알 수 있게 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무덤 안은 전부 벽돌로 축조돼 있었다. 또 그 안에는 왕과 완비의 관과 함께 여기저기 다양한 귀금속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곳에서 발견된 부장품들은 총 108종 2906점이나 됐다. 현재 국보로 지정된 것만 12점에 달한다. 

더불어 무령왕릉의 가장 큰 특징은 동양 3국의 문물을 이용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백제의 무덤은 돌무지무덤에서 굴식돌방무덤으로 변해갔는데 특이하게도 무령왕릉은 벽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들었다. 이러한 특징은 중국 남쪽 지역에서 흔히 보여졌던 것으로 따라서 학계는 무령왕릉이 중국 남조의 영향 속에 축조됐다고 얘기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 열도의 남부지방에서 자생하는 나무인 금송으로 무령왕과 왕비의 시신을 담고 있는 관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볼 때 무령왕은 백제의 왕이면서도 중국의 남조나 일본과 긴밀한 연결점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무령왕릉 안으로 들어가서 이러한 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후 사람들의 빈번한 왕래로 인한 심각한 문화재 훼손으로 현재는 입구를 닫아놓은 상태다. 하지만 인근에 위치한 고분의 내부를 정교하게 본뜬 모형이 전시된 모형전시관에서 그러한 역사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이 무령왕릉 외에도 6개의 무덤이 더 있다. 하지만 이중 능의 주인이 정확히 밝혀진 것은 무령왕릉 뿐이다. 따라서 나머지 능들은 임의로 1호, 2호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무령왕릉을 비롯해 이 6개의 능의 근처를 천천히 걷다보면 교과서에서나 읽었던 백제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 든다.

글·사진=홍서윤 기자 classic@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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