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최 명 환
유성한가족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필자가 통계를 내 보거나 확인해 보지 않아서 정확하진 않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보험을 많이 드는 것 같다. 차가 있는 사람은 최소한 자동차 보험을 들었을 것이고 암 보험, 종신 보험, 실손 보험 등등 많은 보험 상품 중 하나 정도는 가입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왜 이렇게 보험에 많이 가입할까?

갑자기 사고가 나거나 병으로 쓰러진 사람이 아무런 보험도 들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되면 대개 우리는 이렇게 반응한다. "아이고, 보험이라도 하나 들어 놓지!" 이때 쓰러진 사람은 보험을 들어 놓음으로써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사고와 그에 따른 부담을 덜어줄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이런 반응들을 경험하면 보험에 가입하지 않기가 어렵다. 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나를 돌보는 것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고 내가 그들에게 짐이 되길 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 보니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왜 우린 죽거나 무의식으로 되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걸까?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이다.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보다 부모의 도움을 전적으로 오랫동안 받아야 되는 존재이다. 우리에게 부모와의 유대감, 애착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사항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부모를 살피고 부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그래서 눈치도 보고 심부름도 하고 부모의 인정을 받으려 노력한다.

성장하고 의존성이 점차 사라지면 그럴 필요가 없어지고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상태가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고 철저히 의존적인 상태가 된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끝까지 믿어줄 사람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한다. 사고가 나고 경제적인 능력이나 자기를 돌볼 능력이 떨어지면 다른 사람의 짐이 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내가 불편한 존재가 되더라도 그것을 상쇄할 만한 보상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보험은 비교적 안전하게 나를 돌봐주는 사람들을 지치지 않고 곁에 둘 수 있는 보호막의 작용을 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 우리는 보험이 자신의 경제적 역할이 멈췄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버리지 않게 해 줄 보호막이 돼 줄 것이라고 믿는 것 아닐까?

이식 수술을 하고 이후에도 수많은 입원을 반복하던 한 가장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이렇게 살 바에야 가족들에게 부담이라도 들이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때 아내가 "당신이 살아서 내 원망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자식들이 병원비를 내기 위해서 열심히 살게 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당신 역할을 다 했고, 우리는 당신을 돌볼 빚을 진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하자. 난 그 가장에게 가장 훌륭한 인생의 보험을 들었다고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 보험이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아낌으로 어떠한 시련도 떨어뜨릴 수 없는 강한 애착관계이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위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닥친 시련은 그들의 사랑을 확인할 기회로 바뀌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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