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옥 칼럼]

꽃피는 춘삼월이라고 했다. 만물이 희망의 싹을 활짝 틔우는 계절이다. 봄꽃이 평년보다 사흘 정도 빨리 필 것이라는 예보가 나올 즈음 '벼랑 끝에 몰린 세모녀의 동반자살 소식'이 전해져 마음을 아리게 한다.

무엇이 그들의 가슴을 짓눌렀기에 그리 됐을까. 이들은 서울 반지하 셋방에 살면서 고달픈 삶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집주인에게 남긴 글귀에서 소시민의 착한 심성이 그대로 묻어난다.

식당일을 하는 60대 어머니와 병마에 시달리던 30대 큰딸, 그리고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힌 둘째 딸의 기구한 삶은 끝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말았다. 성실하게 살아가던 그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가장 노릇을 하던 어머니가 넘어져 팔을 다친 후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면서부터다.

한 집안의 살림살이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면 가족 구성원들의 삶이 온통 풍비박산이 되고 만다. 주거나 고용, 교육, 건강, 시민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그게 절대빈곤층의 민낯이다. 물론 복지라는 이름아래 사회안전망이 구축돼 있기는 하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번 빈곤의 늪에 빠지면 헤어나기가 힘든 사회구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계층의 고착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우리나라 빈곤탈출률은 2000년 48.9%→2012년 23.45%로 급격하게 낮아졌다. 저소득층이 빈곤에서 탈출해서 중산층, 고소득층으로 이동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소외 계층으로 전락한 그들에게서 희망, 꿈, 행복 따위의 단어는 호사스런 장식물에 불과하다.

빈부 격차가 갖가지 사회불안과 갈등을 키우고 있다는 진단은 간과할 일이 아니다. 상위 계층의 기득권 지키기는 날로 집요해진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콜럼비아대 교수는 이를 상위계층의 탐욕이라고 규정한다. 그건 결국 경제의 효율성 저해는 물론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도 소득 불평등 문제를 세계 경제의 중대 위협 요인으로 꼽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부의 대물림 현상의 고착화, 그건 바로 교육의 대물림과도 연관된 주제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자녀 사교육에 매달리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예전엔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야 사회 주류로 행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 까닭이다.

생활고로 인한 자살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를 8년 째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너무 쉽게 자살하는 풍조는 경계의 대상이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단계가 아니다. 모녀 동반자살 사건 역시 주변에 도움 요청도 하지 않은 걸로 드러났다. 복지전달체계의 그물망을 꼼꼼히 정립할 때도 됐다.

이웃을 따스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 사회적 배려가 긴요하다. 국가 또한 국민의 인간다운 삶의 보장 의무를 이행해야 마땅하다. 선거 때만 되면 민생 공약을 남발하다가 일단 당선되고 나면 슬그머니 꽁무니 빼는 행태는 이제 그만 하라. 정치권이 긴장하지 않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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