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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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잇스탠드(One Night Stand)는 꿈에서 시작해 꿈으로 끝난다. 그 꿈은 단지 열망의 봉우리를 터뜨리는 만개(滿開)가 아니라, 몸을 여는 개문(開門)이다. 드라마작가인 빅토르('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주인공)는 우연히 알게 된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는다. 한껏 몸이 달아오른 두 사람은 갓난아이를 힘겹게 재운 뒤 침실로 직행한다. 그런데 서로 옷을 벗기고 사랑을 시작할 찰나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갑자기 여자가 죽어버린 것이다. 빅토르는 고민에 휩싸인다. 출장 중인 그녀의 남편에게 연락할까? 경찰을 불러야할까? 빅토르는 고민 끝에 그냥 도망치기로 한다. 처음 만난 여자와 꿈꿨던 '사랑 없는' 혼외정사는 결국 ‘봄눈’처럼 허망하게 끝났다.

▶10년 전, 머리 쪽에 큰 수술을 받았다. 수속이 복잡했던 국립대병원이 싫어 허접한 동네병원에 쓸쓸히 머리를 맡겼다. 어쩌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울퉁불퉁 흉터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그날의 수술은 정말 끔찍했다. 전신마취에서 깨어나며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황당하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슬픈 표정이 아니라 '원나잇스탠드'였다. 암전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면서도 생물(生物)의 꿈을 꿀 수밖에 없는 마음의 질량이 너무나 가볍고 한심했다. 생몰의 연대기를 사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노예다.

▶언제나 '봄'은 서두른다. 고샅길 목련꽃망울도, 따사로운 햇살도, 온몸에 수액 오른 나무들도 찰나에 핀다. '봄이야'라고 외치기도 전에 입춘이 지나가고 우수(雨水)가 온다. 동구 밖 대추나무에도 봄이 걸렸다. 아침에 눈을 떠 하늘대문을 젖히면 겨울은 하얀 솜옷을 벗고, 녹색의 홑겹 옷을 입고 있다. 아직은 서툴러 퀭한 얼굴이지만 그래도 봄은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그래서 가끔은 봄처녀들도 가던 길 멈추어 서서는 중얼거린다. "지금이 봄이야, 겨울이야."

▶휴대전화가 울린다. 나를 기억하는 동무들이 생사를 물어온다. '미안하지만 살아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무안하지만 살아 달라'고 위로한다. 두꺼운 옷을 벗는다. 봄이 옷깃 사이에 살짝 숨어있다. 알몸은 촉수를 감춘 채 가위눌린 ‘몸’과 솥뚜껑보고 놀란 ‘맘’을 번갈아 만지며 낄낄거린다. 아, 올 겨울도 잘 버텼다. 뼈마디까지 시린 몸살 몇 번 앓고, 고뿔 몇 번 앓았더니 봄이 온 것이다. 마치 '좀 놀아본 오빠'의 허풍처럼 봄꽃이 화들짝 피어있다. 저만치~.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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