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을 가다
봄찾으러 설레는맘 남쪽 왔건만
누가 봄 왔다했나 칼바람 매섭네
통영사람들은 ‘토영’이라 부르는곳
‘이응’ 발음 익숙치 않아서 정겨워
일제강점기때 만들어진 해저터널

?▲미륵산 정상에 오른 등산객들이 한려수도를 바라보고 있다.

북벌(北伐)을 꿈꾸는 봄을 맞으러 남진(南進)했다. 봄이 한반도에 다다랐다는 뉴스가 겨우내 움츠렸던 심기를 건드렸다. 올해는 활짝 핀 동백꽃을 보리라는 속 깊은 다짐도 있었다. 그래서 떠난 곳이 한반도의 또 다른 토말리(土末里), 경남 통영이었다. 흔히 통영을 이를 때 예향(藝鄕)이라고 한다. 김상옥, 박경리, 이영도…. 그리고 그 중심엔 바다와 깃발을 하나의 객체로 느끼게 한 청마(靑馬) 유치환이 있다. 그러고보니 올해가 청마의 해 더라. 참 얄궂게도 통영을 찾은 14일은 청마의 47주기 다음날이었다.

글·사진=이형규 기자 hk@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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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취한 밤

어느 누가 통영에 봄이 찾아왔다고 했던가, 칼바람보다 더 세차게 몰아붙이는 바닷바람에 옷깃을 더욱 여몄다.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의 문필에서 낙원으로 묘사됐던 통영.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미륵산 정상에서 한려수도를 한 눈에 보는 게 일품인 도시. 그런데 통영을 가장 가깝게 보려면 걸어야 한다. 주차간산(走車看山)은 통영에서 통하지 않는 말이다. 짠 내 섞인 바다에서 삶을 버무린 통영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토영 이야~길'이라고 부른다. 길 이름에서 '토영'은 통영의 연속되는 이응 발음이 쉽지 않던 지역 사람들의 사투리이고, '이야~' 는 누이를 부르는 통영만의 정겨운 표현이다. 그래서 탄생한 길 이름은 '통영답다'할 만하다. 통영의 수많은 역사와 예술혼을 뿌린 사람들을 간직한 유적지와 보기에도 아까운 명승지를 하나로 묶은 이 길은 대략 12㎞ 정도 되지만 가깝게 엮었더니 딱 10㎞ 나온다. 3시간 정도면 통영의 봄을 만끽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려해상국립공원을 제 앞마당처럼 샅샅이 뒤지며 풍광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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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그레한 통영대교

어둠이 드러누울 때쯤 보는 통영대교는 부끄러움을 온몸에 머금었다. 석양에 제 몸을 맡겨 발갛게 달아오른 게다. 석양이 반쯤 걸린 대교는 이내 초록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석양을 떠나보내고 자신의 원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게다.

대교가 불을 뿜기 시작하면 이내 몰려온 자동차의 꼬리등이 하나하나 빨간 점을 찍는다. 마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변한다. 자동차의 꼬리등은 트리에 매달린 장식품이 되는 것이다. 트리라고 느끼는 순간, 봄은 후퇴하고 겨울이 다시 몰려온다. 다시 발길을 해저터널(등록문화재 제201호)로 돌렸다. 대교를 건너가야 하지만 저 높은 곳까지 어둠을 뚫고 가기가 무서웠음을 고백한다. 대교를 건너지 않고도 바다 저 건너편으로 가려면 가장 편리한 방법이다. 483m인 해저터널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져, 차가 지날 수 있을 만큼 커다랗다. 터널은 산책을 나온 관광객보다 바다를 건너가려는 주민이 많았다. 여기서 만난 한 노부부는 지나던 발걸음을 멈추고 한쪽에 마련된 전광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역 예술인을 열거해놓은 전광판에는 유치환의 얼굴이 가장 앞에 있다. 미륵도와 본토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은 다리를 놓으면 일본으로 가는 배가 지나기 어려워 바닷물 양쪽에 방파제를 쌓아 터널 구조물을 만든 후 다시 방파제를 철거해 완성했다. 지금은 충무교와 통영대교가 놓여 해저터널은 이제 사람만 지날 수 있는 소로(小路)가 됐다.

해저터널을 빠져나오면 바로 옆에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착량묘(鑿梁廟)가 있다. 충렬사가 임금의 명을 받아 지어진 것이라면, 착량묘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 전란이 끝난 직후인 1599년 수군과 주민이 뜻을 모아 초당을 지어 봄·가을로 제를 올렸던 곳이다. 이 지방에서는 한산대첩 때 죽은 일본인 원귀가 자주 나타나 주민들을 괴롭혀 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충무공의 사당을 모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충렬사는 1606년 선조의 명을 받은 통제사 이운룡이 지은 이순신 장군 사당으로 중국 명나라 신종이 이순신 장군에게 보내온 8종류의 물품이 함께 전시돼 있다. 충렬사를 나와 충렬로를 쭉 걸어가다 보면 벼랑 위 길인 ‘벼락당’이라고 명명된 길을 만난다. 이 길에서 바라보는 명정동과 서호동 일대 산마을의 지붕은 가지각색의 상자를 포갠 것처럼 앙증맞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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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잡힐 듯한 대마도

항구의 소음이 깨운 아침은 활기를 더했다. 선박을 정리하던 선원들은 중장비를 이고 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삶이란 참 오묘하다.

시계는 벌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30분만 있으면 미륵산을 거슬러 오르는 첫 번째 케이블카가 시동을 건다. 왕복 9000원이면 한려수도, 멀리 대마도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시간당 1000명을 태우고 움직인다는 이 육중한 몸집의 기계는 소음도 없다. 바람을 가르며 두 개의 줄에 의지해 중력을 거스른다. 누가 이런 산중에 케이블카를 놓자고 했을까. 정말 상을 줘야 한다. 케이블카에서 발을 내려놓으면 산 정상에 오를 순간이다. 나무인지, 나무 모양을 한 콘크리트인지 모를 데크에 발을 디디면 손쉽게 꼭대기에 다다른다. 누군가 오르는 길목에 돌탑을 쌓았다. 이걸 보고 사람들은 전북 진안 마이산의 탑사를 떠올린다. 탑사는 이갑용(李甲用, 1860~1957년) 처사가 1885년부터 30여 년간 마이산의 돌을 모아 사찰을 만든 곳이다. 경남에서 전북을 떠올린다니, 이런 게 바로 기시감(旣視感)이다.

정상에 올랐더니 바닷바람이 세차다. 귀에 바람이 머물러 웅성거린다. 물 한 모금으로 목도 축였으니 이제 하산할 때다. 내려가는 길은 한 번 올라와 봤기에 한결 수월하다. 단지 다른 길을 택했을 때 이 생각은 빗나가는 것이다. 내리막에 '박경리 묘소 전망대'라는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박경리 묘면 묘지, 전망대는 뭘까. 5분쯤 걸었을까, 멀리 박경리 묘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든 쉼터가 있었다. 그곳에서 본 작가 박경리의 묘는 아주 자그만 한 둔덕이었다. 묘라고 지칭하지 않았다면, 작은 모래 언덕으로 치부했을 것이 분명하다. 볼 장을 다 보곤 비탈진 데크를 걸어 다시 케이블카다.

출구를 나와 조금만 내려오면 버스 정류장이 있더라.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남망산 조각공원으로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통영 중앙시장이다. 시장은 기착지에 불과하다.

남망산 조각공원에 수줍게 핀 동백꽃이 소담하다. 길의 시작은 통영에서도 가장 깊은 속살, 강구안 문화마당이다. 문화마당에는 풍전등화 같던 나라를 구해낸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세 척과 판옥선이 정박해 있다. 단, 안을 들여다보는 조건으로 돈을 내야 한다.

길은 강구안 동남쪽에 솟아 한려수도를 조망권에 둔 남망산 조각공원으로 이어진다. 미륵산의 반대 방향이다. 봄 바다를 배경으로 전시된 조각 작품들 사이를 걸으면 어느새 완연한 봄기운이 몸에 부딪힌다. 하나둘 피어난 동백꽃도 남망산 조각공원의 이맘때 풍경 중 하나다.

남망산을 내려와 시인 김춘수 생가를 지나니 벽화마을로 꽃을 활짝 피워낸 동피랑마을이다. 동피랑마을은 '동쪽 벼랑'이란 뜻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의 동쪽 성곽 문루였던 동포루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애초에 마을을 모두 헐어내고 예전 동포루 모습을 되돌려 공원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시민단체들이 앞장서서 지켜냈다.

그들이 2007년 개최한 '동피랑 색칠하기 전국벽화공모전'에 18개 팀이 참가해 담벼락을 캔버스 삼아 작품을 그렸는데, 이 일이 여러 사람의 입소문을 타면서 통영의 대표적 볼거리로 자리매김했다. 민심이 관을 이겨낸 것이다. 무조건 재개발하는 게 지역 발전의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례다. 통영의 동피랑마을에는 핀란드의 앵그리 버드부터 전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뽀통령' 뽀로로까지 톡톡 튀는 벽화와 관광객에게 인정 넘치는 주민 그리고 통영항과 한려수도를 굽어보는 빼어난 바다 풍광이 있어 마을을 지켜낼 수 있었다.

동피랑마을에서 필수 관광코스가 된 곳은 전망대 옆 동피랑구판장이다. 동피랑 벽화 만들기에 앞장섰던 박부임 여사가 끓여내는 빼때기죽은 통영에서도 별미로 알려졌다. '빼때기'는 말린 생고구마를 걸쭉한 죽 속에 넣어 이루 말할 수 없는 식감을 자랑한다.

동피랑마을에서 벽화작업을 하던 화가들이 더운 몸을 식혔다는 '바람의 골목'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드디어 청마 유치환의 생가터다. 이곳만 지나면 통영 여행의 마지막 코스, 통영시 향토역사관과 세병관(洗兵館)에 발이 닿는다.

삼도수군통제영 중심 건물인 세병관은 이곳이 임진왜란이 끝난 후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남쪽 중심기지가 되면서 1603년 지어졌다. 세병관의 뜻은 '은하수 물을 길어 무기를 닦는다'이다. 임진왜란을 겪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이 서려 있다. 400년을 훌쩍 뛰어넘는 세월을 견뎌온 이 우람한 건축물의 단청은 빛이 바래 세월의 더께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세병관을 나와 통제영 성안 아홉 우물 중 하나였다는 간창골우물과 옛 통영청년단회관을 지나면 해저터널에서 끼적인 충렬사, 바로 그곳이다.

이 여행기는 기행이었지만 사실 인물 열전이었다. 이순신 장군과 시인 유치환, 작가 박경리를 거쳐 시인 김춘수까지. 그들의 삶에 녹아들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들에겐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기에, 얼굴만 슥 바라보고 등을 돌려 와야 했기에, 녹아들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봄인 줄 알고 떠난 여행은 봄이 아니더라. 누군가 이 여행기를 보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이 말도 옛말이 되었기를 바라며 여행기를 내려놓는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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