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 ?
?

▶핏물이 낭자한 침대에 여자가 쓰러져있다. 발가벗겨진 그녀의 몸에 붉디붉은 혈루가 흐른다. 죽을힘을 다해 반항한 듯한 음부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 숨은 붙어있으나 분명 겁간(劫姦)의 흔적이다. 여자 옆에는 혼백이 나간 한 남자가 죽어있다.

이때 현관문을 밀치고 또 다른 사내(준)가 들이닥친다. (중략) 소설 속 주인공 '청연'과 '준'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하지만 이 짧은 '5분의 사건'으로 둘의 '50년 인생'은 파국을 맞는다. 죽어있는 남자는 여자의 직장상사다. 국과수 부검결과 이 남자의 정액은 검출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청연의 몸에서 나온 것은 갓 마르지 않은 '준'의 정액이었다.(…)

▶20년 전에 쓴 소설 '파국'의 일부다. 200자 원고지 2000장, 24만자 분량이다. 물론 '처녀작'으로 출판될 뻔했지만 결국 '사산'됐다. 당시엔 낙담이 컸으나, 생각해보면 허섭스레기 같은 작품이 세상 밖으로 '출산'되지 않은 게 천만 다행스럽다.

그때는 급전이 필요해 관음증을 자극하는 작품이 필요했다. 근래 5년 6개월간 또 한 번 본연의 생살을 뜯으며 200자 원고지 2000장, 24만자 분량의 원고지를 채웠다. 이 또한 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더 늦기 전에 '출산'하기 위해 몸을 풀고 있다.

▶언론황제 루퍼트 머독은 1969년 영국신문 '더 선'을 인수한 후 '페이지 스리 걸(Page3girl)'이란 걸 만들었다. 가슴을 풀어헤친 여자모델의 사진을 매일 세 번째 면에 실었던 것이다. '너무 난잡하다'는 비난이 쏟아졌으나 적자에 허덕이던 신문을 흑자로 만드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 '선데이 서울'은 1968년 창간해 1991년 사라진 성인잡지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선데이 서울의 주제어는 결혼, 배신, 살, 체취, 용두질, 탈선, 욕정이었다. 여기에다가 여자 수영복사진은 23년간 단 한 차례도 빠트리지 않을 정도로 벗기는데 집착했다. 장삼이사들은 겉으론 음란한 도색잡지라고 손가락질 했지만 숨어서는 키치(Kitsch)적 관음을 즐겼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외설은 '눈'(종이)에서 '손'(스마트폰)으로 옮겨가고 있다.

▶노숙, 허기, 퇴짜, 배신, 좌절, 상처로 점철된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계적인 작가다. 내놓는 족족 수백만 권이 팔려나가니 책 쓸 시간보다 돈쓸 시간이 없다. 하루키스트(하루키의 열성팬)들은 그의 또 다른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

나 또한 가을바람이 부니 문기(文氣)가 짙어진다. 불현듯 (거쳐 간) 소수의 사랑들과 (거쳐 간) 소수의 문자(文字)들이 떠오른다. 골방에 처박혀 요분질을 상상하며 소설 쓰던 청년의 눈물도 오버랩 된다. 누구나 소설 몇 권쯤은 나오는 인생이다. 사는 게 소설이고 사는 게 작품이기 때문이다. 책 읽기 좋은 계절의 진앙에 와있다.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