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 ?
?

▶잠이 깬 가을은 시나브로 발기해 있다. 마치 여인네의 치마 속을 헤집듯 아침바람이 처연하다. 짙은 솔향, 치렁거리는 햇볕, 창백한 오후, 쓸쓸한 민낯이 카마수트라의 성애를 닮았다. 남자들은 여인의 깊고 깊은 성소에 살을 부비듯 가을에 빠져든다.

사계절을 살며, 왜 유독 '가을'에만 집착하는지 가을조차 속고 있다. 짝사랑일 것이다. 확 보여주지 않고 조금씩 보여주며 감질나게 하니 가을이 더더욱 절박하다. 이제 지루했던 여름날의 내홍은 절멸하고 있다. 그렇게 밀애를 꿈꾸던 가을의 사랑이 오고 있다.

▶송나라 말기 강왕은 주색에 빠져 시종(侍從)의 부인마저 능욕했다. 더구나 시종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귀향까지 보냈다. 얼마 후 남편은 아내를 그리워하다 자살했고, 이 소식을 들은 아내 역시 목숨을 끊었다.이때부터 상사병은 서로 그리워하나 맺어지지 못하는 사랑을 지칭한다.

황진이를 애모하던 서생, 로테를 못 잊은 베르테르, 짝사랑을 못 견뎌 세상을 등진 빅토르 위고처럼 가을은 상사병을 돋게 한다. 사람과 사랑을 그리워하게 한다. 가을이 있는 것은 지독한 여름을 견디어낸 것에 대한 보상이다.

더불어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만약 여름날의 폭염이 없었다면 가을은 이렇게까지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 겨울의 혹한이 없었다면 가을은 그저 싱거운 상념일 뿐이다.

▶단풍놀이는 시(詩)와 술과 숲과 높이가 필요하다. 그래서 등고(登高)이자 유산(遊山)이다. 단풍은 곧 주검인데, 나무 잎새는 결코 나무를 짝사랑하지 않는다. 미련 없이 나무에게서 떠나간다. 겨울에 잎을 달고 있는 건 맥없이 영양분을 축내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잎을 떨군다. 제 몸의 전부였던 것을 아낌없이 버린다는 게 어디 쉬운가. 하지만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나무는 사람에게 가르친다. 시들지 않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교훈이다. 단풍은 산꼭대기에서 아래쪽으로 하루 40m 정도씩, 북에서 남으로 25㎞씩 내려온다. 이게 가을의 속도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정수리에 있는 머리카락이 소멸되고 있다. 단풍의 남진(南進)이 아니라 그냥 추풍낙엽(秋風落葉)이다. 가을날의 우수(憂愁)다. 그런데 나무처럼 가벼이 잎새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내 몸의 전부였던 것을 아낌없이 버리기가 싫은 것이다.

새털 같은 희망은 곧 절망이 되리라. 터럭을 잡고 애원해도 내 몸은 ‘잎’을 떨구고, 새순을 틔우려 안간힘을 쓸 것이다. 하지만 어제 지나간 길을 오늘 또 다시 걷듯, 어제 본 풍경을 오늘 또 보듯, 어제 세상을 향해 쏟아내던 오줌을 오늘 또 내갈리듯, 인생은 시시할 게 뻔하다. 왜?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당신이 나에게, 내가 당신에게. 털털털….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