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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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시베리아로 출병한 일본군은 전투보단 섹스와 싸워야 했다. 7개 사단 중 1개 사단이 성병에 걸릴 만큼 공창(公娼) 때문에 오금이 저렸다. 일본은 이 어처구니없는 소모를 막기 위해 1931년 9월 만주사변 때부터 위안소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국 창녀만으로는 인원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조선 유곽, 색주가, 사창가의 작부, 매음녀를 데려다 썼고 이마저도 모자라자 일반 조선여성을 강제로 차출했다. 패전 후에는 미군 점령군이 자국 부녀자들을 겁탈할까봐 5만여명의 위안부를 별도로 만들었다.

▶1944년 7월 26일자 경성일보에 '위안부 급구'라는 광고(가로 9㎝ 세로 6㎝)가 실렸다. "월급은 300원, 선불 3000원 가능, 17세 이상 30세 이내 신체 강건한 여성, 후방 ○○부대 근무, 경성부 종로구 낙원정 195번지 조선여관서 면접 후 즉시 채용…." 광고 문구는 그럴싸했으나, 사실 이 달콤한 일자리가 바로 위안부였다. 일본은 광고 외에도 동네이장, 반장부인, 순사(경찰), 군인을 동원해 위안부를 모집했다. 또 동네를 돌아다니며 한 집에 적어도 딸 한 명씩은 내놓아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일본 놈도 문제지만 조선 놈도 문제였던 것이다. 간혹 배고팠던 시골소녀, 가족의 빚을 청산하기 위한 여자들이 광고 문구에 속아 팔려가기도 했다. 위안부 총인원은 정확한 자료가 없으나 대략 20만명으로 추산된다.

▶1945년 1월 20일 찬바람이 속곳을 얼리던 그날, 위안소에 다나카 마사히로가 들어섰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비릿한 술 냄새가 찬바람을 타고 코를 찔렀다. 다나카는 반쯤 감긴 눈을 게슴츠레 뜨며 조선의 '도라지꽃'을 향해 덤벼들었다. 소녀가 그의 몸을 밀치며 격렬하게 반항하자 다나카는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소녀는 반쯤 기절했다. 다나카는 욕구를 채우고는 군도를 꺼내 소녀의 몸에 칼집을 내고, 담뱃불로 가슴을 지졌다. 이렇게 조선 여인은 매일밤마다 일본군 10~30명씩을 몸으로 받아냈다. 그러다보니 웬만하면 성병에 걸렸고, 임신과 강제 중절수술을 번복하거나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다.

▶일본의 전통적인 발싸개인 '다비(足袋)'는 돼지족발을 닮았다. 이들이 짤각거리며 신는 나막신은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에 끈을 끼어 넣는다. 이 신발을 신으면 발가락이 '두 쪽으로 갈린다' 하여 쪽발이다. 지금도 우리는 일본놈들을 ‘쪽발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를 식민지 삼아 40년간 강압 통치했던 나라, 징병·징용·종군위안부로 800만명이나 사지로 몰아넣은 나라, 벌건 대낮에 우리 궁궐을 습격해 왕후를 살해한 미개한 나라, 그러나 일말의 반성이나 사죄의 기미가 없는 나라이니 '쪽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쪽발이~”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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