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수 교장

오늘도 새벽 다섯 시경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 학교 구석구석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직원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아침운동을 하고 지루한 시간을 기다린다.

학교에 도착하는 시각이 여덟 시경, 벌써 어린이들은 모두 특기적성수업에 들어가 있다. 육상 꿈나무로 성장하는 어린이들은 운동장 한 쪽에서 강화훈련을 하고, 외국인 강사에게 영어를 따라배우는 소리, 음과 훈을 리듬에 맞추며 한자를 익히는 소리, 컴퓨터를 배우는 어린이, 학력경시부 어린이들의 숙연한 모습, 도서실의 집단 독서 지도는 내 차지다.

무엇이 재미있는지 빙그레 웃는 모습, 일그러졌다가 울상을 짓는 모습, 메모도 하고 그림을 그리며 책을 읽는 어린이들, 이유를 물어볼까 하다가도 방해될까 봐 그냥 지나친다. 요즘 들어 어린이들의 능력은 무한하고 좋은 환경은 생활 습관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먼지가 쌓였던 도서실, 잠겨 있던 컴퓨터실, 교과 성적이 떨어진다고 극구 반대하던 운동부 어린이의 학부모들, 선생님들의 열과 성의에 따라서 용광로에 들어간 쇳덩이가 녹는 것처럼 혼연일체가 돼서 새로운 기기로 태어난다는 것을….

이제는 한 순간이 아쉽다. 선생님들의 출장명령을 결재하는 순간이 활기 넘치는 순간이다. 내일 그 학급은 내 차지이기 때문이다. 결재 후 즉시 그 학급 진도표를 확인하고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어느새 초임시절 교수 요목기에 가르치던 방법이 되살아난다. '이 시간 요것만은 꼭 완성시켜야지'. 쉬는 시간도 없고 하교시간도 늦어진다. 점심 시간에는 어린이들과 어울려 축구도 해 본다. 아직은 체력도, 마음도 한창인데, 3개월 후면 교직을 마감하게 되다니….

3월 2일 시업식부터 43년을 매년 해오던 행사이건만 새롭기만 하다. 안면도 국제꽃박람회에 호계의 온 교육가족이 함께 갔던 일, 총동창회 체육대회에서 함께 어울려 풍물놀이하던 일, 운동회에서 학부모님들과 같이 뛰던 일, 한순간의 조그마한 일들도 머릿속에 꼭꼭 들어박힌다.

그동안 못 다한 일을 마저 하라는 뜻인지 행운인지, 마지막 학년도는 참으로 많은 일이 주어졌다. 2001년 과학·정보 우수학교 표창을 받은 것을 기반으로 지난해 농어촌 거점학교로 지정받아 도서 정보 모델학교로 육성해 보고자 자율검색 통합공간을 구성하고 인터넷방송국, 도서전산화, 멀티미디어 감상실 등을 구성·운영했으며, 독서 중심의 교육 패러다임 형성을 위한 학교심사도 받았다. 또 투시형 담장을 설치하고 울타리를 보수해 조경사업도 했다. 퇴임한 학교는 생이 다할 때까지 머리 속에 남는다던데….

이 모두가 나에게 행복한 갈무리를 위해 내려준 복이라 생각한다. 이제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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